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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의 법칙

목회/목양칼럼 / 2014. 5. 28. 16:42




2014-05-28 목양칼럼


관상어 중에는 코이라는 잉어가 있는데, 이놈은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cm밖에 자라지 않지만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두면 15~25cm까지, 그리고 강물에 방류하면 90~120cm까지 성장합니다.

같은 물고기인데도 어항에서 기르면 피라미가 되고, 강물에 놓아 기르면 대어가 되는 신기한 물고기입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코이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물론 금전적인 환경이 중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가능성을 발휘하는 것에 있어서는, 돈보다 주변의 사랑과 기대가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미칩니다.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도 주변에서 자꾸만 못한다, 부족하다, 틀렸다는 말을 듣고 구박을 받으면 마음이 죽게 됩니다. 반대로 조금 부족한 자질의 사람이라도 주변에서 사랑하고 기대하는 마음을 주면 놀랍도록 성장하는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귀머거리에 맹인이었던 헬렌켈러를 훌륭하게 키워낸 애니설리반이나, 낙제생이었던 에디슨을 위해 가정학교를 열었던 어머니를 떠올려 보십시오. 

당신 앞에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미래를 열어가는 것에 당신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함께 고민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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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5 목양칼럼 


중국 <후한서(後漢書)> 최인전에는 '褰裳濡足(건상유족)'이라는 말이 나온다. (세상에) 일이 있을 때면 (마땅히) 옷을 걷고 발이 물에 젖는 것을 무릅써야 한다.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도 (발이 젖는 게 두려워) 구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말(人溺不拯則非仁也)이 이어진다. 어려울 때에는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고(救俗), 평상시에는 예를 지키라(守禮), 벼슬자리에 나가면 공정을 행하고 사사로운 욕심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말도 보인다.

실천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 비겁한 양심은 아는 것을 사는 것으로 대치해 버리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언제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배웠다. (엡 4.13)

손을 더럽히지 않고 어떻게 더러운 것을 치우겠으며, 발이 젖지 않고 어떻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눈물과 땀을 흘리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교회’가 세워지며, 나를 헌신하지 않고 어떻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앙은 삶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관념이 아니다. 신앙을 삶으로 승화하지 않는 이상, 그 신앙이 당신을 구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철저히 마음에 새기고 명심할 교훈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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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8일 목양칼럼


진리는 태생이 외롭다.

진리가 드러나면 만민이 환영하며 나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유치한 생각이다.

진리는 역사 속에서 항상 그것을 음해하거나 죽이려는 위험에 직면해 왔다.

그리고 악인은 진리 앞에서 더욱 악해질 뿐이지 좀처럼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래서 악의 결말은 대부분이 멸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에는 매력이 있다.

진리의 매력은 진리가 주는 이익(profit)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진리 안에는 불굴의 의지가 있다. 그것은 죽여도 죽지 않으며, 꺾어도 꺾이지 않는다. 진리는 순교를 당하더라도 반드시 다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진리는 강하다. 진리 자체가 죽일 수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함께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 생명(life)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리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진리의 편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진리와 함께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라. 그것이야말로 사는 길이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삶과 죽음도 가치 없게 하는 타락과 거짓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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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인(動因)이다.

무기가 없으면 막대기를 가지고도 싸울 수 있지만 밥이 없으면 아무리 용맹한 군대라도 싸울 수 없다. 

아무리 중대한 일도 밥 먹고 해야 하고, 심지어 대부분의 일들은 밥을 먹기 위해 그것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밥은 중요하다. 중요할뿐 아니라 심각하다. 

밥의 문제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며, 밥이 있고서야 비로소 인간의 만사(萬事)가 세워지는 것이다. 

과거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다(農者天下之大本也)'라고 했는데, 이는 결국 밥을 만드는 사람이 천하의 근간이라는 뜻이다.


예수님도 밥에 얽힌 사건이 참 많다.

제일 유명한 오병이어(五餠二魚,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이 군중의 밥을 해결한 사건이고, 또한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훑어 먹어서 생겼던 안식일의 논쟁도 역시 사단(事端)은 밥에서 시작되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는 배고픔에 무화과 나무의 가지를 들었다가 열매 없음을 보시고 저주하셨는데, 이는 결국 밥값을 하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경고라고 일차원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초대교회는 밥상 공동체다. 초기에는 성찬과 애찬이 잘 구별되지 못했다. 같이 밥을 먹는 것이 곧 예배의 과정이었다. 그런 점에서 설교보다 식사가 교회의 주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만찬과 성찬을 함께 교훈하고 있는데, 이는 당연하다. 그것이 바로 그 당시 교회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목사가 목회를 잘 하려면, '먹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반은 맞는 말이다. 잘 먹을뿐 아니라 제대로 먹어야 하고 또한 잘 소화시켜야 한다. 밥을 다스리고 정복하지 못하면 목회는 버거운 일이 된다.

목사는 자기만 잘 먹을뿐 아니라 공동체를 잘 먹여야 한다. 밥상을 훌륭하게 만드는 능력이 없으면 공동체는 메마르고 와해된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의 가장 큰 후원자는 잘 들어주는 '마리아'도 있지만, 뒤에서 열심히 상을 차려내는 '마르다'도 있는 것이다. 모든 마르다를 꾸짖어 마리아로 만들려고 하는 욕심은 오히려 목회를 저해(沮害)한다.


밥을 무시하고 사소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꼭' 금식을 권하고 싶다. 일단 사흘만 굶어보라. 밥에 대한 생각이 기본부터 달라질 것이고, 먹는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지 세포 하나하나로 깨달을 것이다. 그 절박함과 간절함을 이해하고서만이, 세상에 흔한 밥상 다툼이 보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이해될 것이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밥(=떡=빵)'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비중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런 삶의 본을 보여 주셨다. 그러니까 신앙을 단순화 시켜서 말해 본다면, 밥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예수 그리스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싸움은 쉽지 않은 싸움이며, 숭고한 싸움이다. 자기 밥을 극복한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위대한 사람이며 세상이 감당 못할 사람이다.

초대교회의 교우들이 전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것은, 사이비 집단을 연상시키는 광신(狂信)의 현상이 아니라, 그들이 은혜로 밥을 극복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자기 밥을 위해 살아가는 수준의 인생이 더이상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자유롭고, 얼마나 파격적이었겠는가! 

밥을 잘 짓고, 그 밥을 넘어서라. 밥도 못 짓는 사람은 신앙을 이룰 수 없다. 자기 밥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이 떡(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은 공허하고 무책임한 괘변이다. 밥이 중한 줄을 알아야, 비로소 그 말씀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다. 그렇게 절실하게 밥을 배운 후에, 그 밥보다 귀한 은혜를, 말씀을 배운다면, 그는 분명 세상에 큰 족적을 남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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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1 목양칼럼


제인이라는 인형을 좋아하는 소녀의 집에 아저씨 한 분이 놀러 왔다. 소녀는 여러 가지 인형을 내보이며 아저씨에게 자랑을 했다. 갑자기 아저씨가 “제인, 너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제일 좋아하니?” 하고 묻자, 소녀는 잠시 깊이 생각한 다음에 아저씨를 바라보고 “제가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드리겠어요. 그런데 절대로 웃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하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아저씨가 약속을 하자, 제인은 방에 들어가더니 아주 못생긴 인형을 들고 나왔다. 코는 문드러졌고, 팔 다리는 떨어졌으며, 옷은 형편없이 낡아있는 인형이었다. 아저씨는 제인에게 “무엇 때문에 이 인형을 좋아하지?”하고 물었다. 그러자 제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사랑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진정한 사랑은 사랑 받을 만한 이유가 보이지 않을 때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모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절망할 수 없으며,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경쟁하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명예와 황금은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있지만, 가장 고귀한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랑에 조건을 걸지 말라. 단서를 붙여 입맛대로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실망을 준다면, 그것은 ‘더 큰 사랑’을 요구하는 청구서와 같다고 여겨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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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와 시대유감

-- 희망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띄우는 편지 --

김종선 목사 (동경드림교회)


2014-05-08 목양칼럼



신조어(新造語)는 시대의 고민과 정신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세상이 바뀌면서 없는 단어가 생겨나는 것인데, 그 없는 단어를 사람들이 찾고 만들어낼 때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와 필요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요즘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기레기’다. 기러기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무엇일꼬?

이 신조어는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기자’와 ‘쓰레기’의 조합이다. 그러니까 좀 풀어서 말로 설명을 하자면 ‘쓰레기 같은 기자들’이라는 뜻이다. 

기자(記者)는 본래 단순한 기록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시대를 감시하고, 사실을평가하고, 심지어 대중을 설득하는 기능을 이미 오래 전부터 해왔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시로 글을 써 교류하는 지금에도 기자는 전문직으로 존중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존엄한 기자(記者)라는 말에 쓰레기가 장식되었다. 왜일까? 

그 본연의 임무를 천연덕스럽게 포기하고 권력과 금력에 야합했기 때문이다. 재벌의 잘못은 아무리 커도 신문에 오르지 못하고, 권력의 실수 또한 알아서 가려주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글[文]은 정직하고,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믿었던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으니, 사회로부터 ‘쓰레기’의 취급을 받는 것이다.

세월호 사고를 앞에 두고, “한 해 일어나는 교통사고에 비하면 많이 죽은 것도 아니다…”는 말을 했다는 국영방송 KBS의 보도국장을 만나기 위해 유가족들이 방송국을 찾았다고 한다. 그것도 어버이날에 말이다. 물론 만나지 못했다. 경찰은 다시 차로 벽을 쌓고 권력의 힘으로 변절한 펜을, 기자를, 방송을 보호했다.



죽어가는 단원고 아이들 수 백 명은 멀거니 지켜보면서도 보호하지 못했던 정부가 입으로 똥을 뱉어내는 이런 사람은 잘도 보호한다. 물론 당장 번거롭고 곤란한 입장은 피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소용은 없을 것이다. 이미 이 시대는 ‘기레기’라는 말로 그런 류(類)의 사람들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단어를 처음 듣는 순간,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개정개역,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재미있는 것은,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는 반어법의 강조구문이 역본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해석되어 있다.


(쉬운성경,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표준새번,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개역성경은 ‘짜게 하리요?’라는 표현을 써서, 마치 소금을 대체하는 어떤 다른 것을 찾고 있는 것과 같은 인식을 주지만 원문의 내용은 이와 다르다. 다른 역본들의 번역과 같이, 소금이라는 것이 한 번 맛을 잃으면 되돌릴 수가 없다는 결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리 양이 많아도, 색깔이 멋져도, 모양이 훌륭해도, 이전에 얼마나 비싼 값으로 구입했더라도… ‘쓰레기’라는 것이다.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어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만 교회 안에다만 가둘 수 있겠는가?

선장이 다급한 순간에 승객을 포기하고 제일 먼저 도망하면, 구조대원이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고서도 속셈만 거듭하다 자기 목숨이 아까와 달려가지 못하면, 경찰과 검찰이 불의를 잡아들이지 못하면, 기자가 정직한 글을 쓰지 못하면, 권력이 국민을 섬기지 못하면… 그것들은 다 맛을 잃은 소금이며, 쓰레기에 불과하다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심지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니,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기독의 기’를 천한 ‘개’로 바꾸어 ‘개독교’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는가! 이 이 얼마나 통탄할 시대인가? 이 얼마나 부끄러운 현실인가? 


말을 해보라. 죽어가는 자식 앞에서, 혹은 죽어버린 자식 앞에서 오열하는 부모들의 애통을 앞에 두고 ‘종북’은 무엇이고, ‘좌우’는 무엇인가? 이념은 무엇이고, 정치와 선거는 무엇인가? 

그보다 원시(元始)적인 인간의 바탕이 드러나고 있는 것을 진정 보지 못하는가? 바다 보다 깊은 애통함이 진도 앞바다를 건너 온 세계를 진동시키고 있는 것이 정녕 보이지 않는가?

금발 아가씨도 알고, 흑인 아저씨도 아는 사람의 기본적인 정서(情緖)를, 슬픔을 어찌 같은 나라의 대통령이, 국회의원이, 기자가 모른다는 말인가? 어찌 목사가 그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그것도 모르면서 어찌 밥을 먹겠는가? 어찌 나라를 통치하고, 글을 쓰고, 강단에서 설교를 하겠는가? 그 빛깔이 아무리 고와도 그런 류(類)의 부산물은 결국 부패하고 냄새 나는 쓰레기가 되지 않겠는가? 말을 해보라, 말을…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에는 타락한 제사장에 대한 신랄한 경고가 등장한다.


(개역개정, 말 2:3)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제사’의 타락은 ‘제사장’의 타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어떻게 제사장이 야합하지 않는데, 잘못된 제물이 드려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죽음을 기다리며 배설하는 짐승들의 떼를 몰아내실 때까지 이러한 야합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예수님께서 그렇게 과격한 호통을 치신 다음에도 아주 오랜 동안 종교는 돈과 권력에 탐닉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셨다. 

말라기서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그들의 자손을 꾸짖고, 짐승의 똥을 그 얼굴에 바르셨다. 부정한 것들을 제하여 버리듯이 그런 자들을 순식간에 망하게 하셨다.

그러나 죄는 깊었다. 돈과 권력을 위해 타락할 사람들은 언제나 줄을 서 있었고, 잠시라도 진정되었던 맑은 물은 그들에 의하여 순식간에 흙탕물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안에서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진도 앞바다의 세월호 속 같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싸움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래서 희망을 가슴에 품는다. 내가 품는 희망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죄로 오염된 사람들이 철이 들고 돈보다 귀한 가치를 깨닫고 훌륭한 인격으로 돌아오기에는, 인생이란 너무 짧고 돈과 권력의 심연(深淵, abyss)은 너무 깊다. 

그러나 아무리 그 유혹이 교묘하고 죄의 성세(成勢)가 대단하다 하더라고, 죄는 결국 심판 아래 있고 창조주의 정의(正義)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나는 의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경고한다. 쓰레기가 된 사람들이여, 회개하라. 

그렇지 않다면, 이제 그 얼굴에 창조주의 손으로 똥칠할 것을 기다리라. 그대들의 권력과 돈이 불[火]의 심판 앞에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그대들의 명성과 화려한 옷은 오히려 더 큰 괴로움의 이유가 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니 그 때가 이르러 후회조차 늦기 전에, 지금 후회하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라.


선량한 사람들이여, 낙심하지 말라. 어떤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희망은 인조(人造)의 공산품이 아니라, 언제나 창조주의 자연(自然)의 산물이다. 그것은 죽은 씨앗처럼 겨울을 지나지만, 봄에는 반드시 싹이 트고, 여름에는 자라나 온 대지(大地)를 덮는다. 

정의와 희망은 무릇 그런 것이다.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만들어 낼 수도 없지만, 죽일 수도 없는, 더 본질적인 하나님의 것(devine thing)이다. 그러니 불의한 시대를 잘 참고 견디라. 타협하지 말라. 같이 쓰레기가 되지 말아라. 얼굴에 똥칠할 짓을 조심하라. 그리고 묵묵히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진리의 길을 가라. 믿음대로 살아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믿는 것을 천천히 실현하라. 


답답함은 무릇 의인의 보상이다. 우리뿐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그러했다. 의인들의 한숨과 눈물이 기도가 되고, 다짐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땅을 떠나지 않았고 다시 꽃 피워 우리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니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을 결코 불행이라 여기지 말라. 그 씨가 자라게 될 미래는 반드시 있다. 하여, 하나님을 바라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시편 12편

(12: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12: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1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12:4)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12: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12:8)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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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3 김장 담그는 날


어린 시절, 이 맘 때면 김장을 했다. 본격적인 추위가 다가오기 직전, 어머니는 시장에 나가서 실하고 싱싱한 배추와 무를 구입하셨다. 보통은 배추를 200포기에서 500포기까지 구입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저씨는 대문 앞에까지 트럭으로 배달을 왔고, 마당에 산처럼 배추와 무를 쌓았다. 그러면 서리가 내리기 전에 김장이 시작되었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다라이에는 고무 호수가 물을 뿜었고 물도 넉넉하게 넘쳤다. 배추는 겉잎이 떼어지고, 하얀 속살이 반으로 쪼개져서 물에 씻겨졌다. 그리고 소금물에 들어가 숨이 죽어갔다. 물에 젖은 배추는 무거웠다. 식구들이 총 동원되었고, 심지어는 이웃까지 몰려와서 함께 김장을 했다.

소쿠리에 받쳐져 물이 빠진 배추를 마루까지 나르면, 여자분들이 모여 앉아서 하하 호호 떠들면서 속을 넣었다. 연하고 어린 배추잎을 골라 시뻘건 김치속을 둥그렇게 말아싸서는 서로 먹여주면 꿀맛이다. 그 맛이 좋아 자꾸만 참새처럼 입을 벌리면, 어느새 김장도 끝나기 전에 속이 아려온다.

김장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보쌈을 했다. 돼지고기를 된장과 커피 등을 넣고 푹 삶아 두툼하게 썰어 접시에 내오면, 우리는 그것을 김치와 함께 먹었다. 한바탕 추운 바람 속에서 땀을 흘리고, 먹는 보쌈과 된장국은 비할 바가 없다. 한국 사람은 그렇게 김치와 마늘과 된장에 인이 박혀서 세포 하나하나 냄새 나는 한국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린 시절, 그 김장이 좋지만은 않았다.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이 싫었고, 나도 도와야 하는 것이 귀찮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넉넉한 김장을 좋아하셨다. 그 시절에는 돈이 없어 김장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김장을 많이 담글 수 있다는 것은 여자의 로망이었다. 그러니 일은 고되어도 싫을 리가 없다. 김장을 하는 동안 해맑게 웃으시던 어머니의 얼굴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장은 절반이, 아니 3/4이 남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동생들마다 나누어 주고, 교회 식구들과도 나누어 먹었다. 매일 그렇게 퍼주다 보면, 정작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나누어 주는 것이 더 많았다고 기억한다.

그래서였을까? 어머니 곁에는 늘 사람이 많다. 지금은 가난해지셔서 예전처럼 김장도 못 담그고, 넉넉하게 나누어 주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어머니 곁에는 늘 따뜻한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자식보다 더 지극하게 어머니를 대해준다.

난 몰랐다. 어머니가 내게 무엇을 물려 주셨는지. 그 힘들고 추웠던 김장이 내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모르고 마흔이 넘었다. 사람은 나누어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 따뜻함은 난방이 아니라 바로 마음에서 전해진다는 것을 어머니는 내게 가르치신 것이다.

시절이 변해서 김장이 사라져간다. 사람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김치를 먹는다. 1년 내내 한결 같은 맛을 보존하는 김치 냉장고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지고, 부자가 되었는데, 왜 나누는 마음은 더 가난할까? 나누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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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7 가장 믿어지지 않는 순간에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이다. 좋은 일로 알았더니 나쁘게 끝나고, 나쁜 일로 알았더니 좋게 끝나는 것이 많다. 그래서 인생 앞에서 사람의 예상이란 번번이 깨진다. 그 예측불가해성을 알지 못하면 그는 결국 인생을 모르는 것이다.

 

(쉬운성경, 전도서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재앙의 날에는 살펴보아라. 이 모든 날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미래를 알지 못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믿음이란, 하나님이 가장 믿어지지 않는 순간에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다.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은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그 무장공비를 용서하고 자기의 양아들을 삼으셨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단순히 훌륭한 믿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마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했다고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도 도그마(dogma)화 시킨다. 왜 필요하고, 어떤 원리가 담겨 있는가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들이 참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느껴진다.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계명을 좇아 자기 아들을 살해한 살인자를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는 마음이 어찌 그토록 담담하고 간단하겠는가? 인간의 실존은 고통이다. 복 받고 싶고, 편안하고 싶고, 아프기 싫은 것이 사람이며,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자에게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이 본능이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다. 그 본능을 다스리고 알고 있는 믿음의 원리를 실천하는 과정은 쉬운 길이 아니다. 그야말로 좁은 길이며, 고난의 십자가이다. 자기를 죽이고서야 비로소 행할 수 있는 믿음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가장 믿어지지 않는 순간’을 필요로 한다. 별이 보이지 않는 폭풍우의 바다에서 등대가 더 절실하게 빛나는 것처럼, 진정한 믿음이란 내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나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안타깝게도 그가 무엇을 알고 있든지, 얼마나 교회를 다녔든지 그는 ‘믿음’에서 낙제생에 불과하다.

도망하지 말아라. 원망하지도 말아라. 전도자의 말과 같이 재앙의 날들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싫지만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지만, 나를 정말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시는 분이 결코 아니며, 나의 맘대로 조정되는 분도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비로소 그분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겸손해질 때에, 우리는 세상이 주지 않는 평강을 누리게 된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올랐을 때에, 정상에서 아래를 보았을 것이다. 작아지고 멀어진 저 아래의 세상… 오는 노정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갈등을 그는 비로소 내려 놓았다.

‘아프지만, 내가 붙잡는다고 지켜지는 아들도 아니지 않는가? 전쟁과 질병과 살인의 위험이 저 아래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을 다 지켜줄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유일하게 이 아이의 생명을 좌우하신다.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만이 중요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칼을 높이 드는 순간, 아픔의 순간은 기쁨의 순간으로 바뀌었다. 불행과 슬픔이 보호와 축복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역시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였다.

 

** 새옹지마 : 

http://100.naver.com/100.nhn?docid=87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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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9 내가 소망하는 목회


내가 바라는 목회는 성공이 아니다. 

굳이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이 내 마음의 중심을 차지한 적은 없다. 따라오면 좋고, 안 따라와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서 느슨한 지도 모른다.

반대로 내가 치열하게 갈망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내가 사도행전에서 보았던 바로 그 교회를 실현하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가시적인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실현보다는 실천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아무튼 내가 성경에서 만나고 이해한 바로 그 성경 속의 교회를 나의 교회로 삼는 것이 맹랑하지만 열렬한 나의 소원이다.

둘째는, 그 교회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라서, 그 교회에서 함께 수고하고 신앙한 사람들이 나와 함께 건강하게 늙어가면 좋겠다. 그래서 나이를 먹고, 백발이 되어서도 서로 중보하고, 사랑하고, 감동을 주는 ’가족’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생각을 한다.

타인과 타인으로 만났다. 성향은 다르고, 경험은 복잡하다. 그러나 진정 예수의 피가 우리 안에 흐르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진하게 경험한다면 모든 차이를 넘어서 순수한 신앙으로 ‘가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희망들은 현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순정이고, 드림(dream)이다.

하지만 나는 목사로서 그것을 소망한다. 그리고 그것을 내 인생에 허락해 달라고 날마다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이를 먹고 황혼이 가까웠을 때에, 내가 복음으로  씨 뿌리고 물 준 사람들이 온 세상에 흩어져 좋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그들과 나란히 앉아 점심 한 그릇 같이 먹는 것이 지나친 욕심일까? 그러나 결국 그것 이상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늘 말하는 바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증명하지 않아도 우리를 아신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증명하려는 태도야말로 불손하며 교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목회를 하는 길이 쉬울까? 이해 받지 못하고, 궁핍을 겪으며, 때로는 외로운 결단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이 길은 구별된 길이고, 하나님이 특별하게 불러 세우신 사명의 길이다. 그러니 걸어야 한다.

최근에야 깨달았다. 사는 것과 사명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사명 따로, 내 인생 따로가 아니라 내가 건강하게 살고, 늙고, 마치는 것이 바로 내가 그토록 원하는 목사(牧師)가 되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나는 동경드림교회 사람들이 내게 그런 ‘가족’이 되면 좋겠다. 무수한 세상의 파도를 같이 넘고, 마침내 백발을 같이 즐기는, 허망한 인생에서 그 마지막을 외롭게 하지 않을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교회가, 목회자와 성도가 진정으로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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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0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늘어간다. 태생적으로 수줍어하는 성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 수준의 도덕, 교양, 그리고 신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이 조금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회가 가지는 일반적 ‘보통’의 수준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에 부족하거나, 혹시 실수로 벗어났을 때에 부끄러워하는 것은 사람다운 미덕(美德)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이를테면 ‘배째라!’ 또는 ‘어쩌라고?’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참 난감하다.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사회가 분위기를 흐리고, 순진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답답한 사람들로 대우 받거나 피해를 입게 되는 것 같다.

진정한 용기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얼굴을 두껍게 하고서 부끄러우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듯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고 개선하여 보다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 되도록 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개선되지 못한다. 자신에게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부끄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남의 잘못에 대하여는 칼날 같이 예리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하여는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살아간다. 그래서 정말 부끄럽게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처음에는 분노하다가도 결국에는 진한 슬픔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그리스도인은 평생에 자기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을, 그리고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신앙은 우리를 책망할 것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이 책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마땅히 부끄러움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바탕을 잃어가고 있다. 주장은 많은데 자기 고백과 반성이 없다. 남의 잘못은 아는데 나의 잘못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섬기고, 사랑하고, 기도해야 하는 의무는 가벼이 여기면서 자기가 받아야 하는 은혜, 권리, 이익에 대하여는 강경하기만 하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자기의 부족을 생각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야말로 희망의 씨앗이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놓여 있다면 이러한 생각의 틀은 당연하기만 하다.

언제나, 하나님과 먼 사람은 자기를 의인이라고 주장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판단은 그 반대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다!)

당신은 요즘 무엇이 아프고 부끄러운가? 자신의 잘못과 부족이 보이는가? 만약 이러한 정서가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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