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쉬운 길로 가지 마라! makarios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896)
목회 (632)
목양칼럼 (474)
설교 (132)
교육 (19)
자료보관 (0)
시편묵상 (7)
인생 (179)
동경in일본 (35)
혼자말 (50)
추천 (0)
12-02 02:34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1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2010-08-08 용서하려면 잠시 눈을 돌리자



아무리 훌륭해도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다.

사람의 마음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야말로 도토리 키 재기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mission)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는 '용서'에 대한 교훈이 많다.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말씀을 하셔서 압박감이 들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 성경을 계속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용서의 부담이 노이로제(neurosis)를 일으킬 지도 모른다.

기도와 말씀의 삶은 결국 '용서'라는 필연적 담(wall)을 만나게 한다.

이것을 '담'이라고 적는 이유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이 용서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용서'라는 것은 넓은 마음으로 상대의 잘못과 실수를 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우리 마음은 그렇게 크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비슷한 크기의 그릇 두 개를 들고 하나를 다른 하나에 담으려고 억지를 부리다가 금이 가게 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설픈 용서의 노력을 하다가 절망한다. 용서해야 할 사람을 품지 못할 뿐더러, 옹졸한 자신에 대하여 죄책감이 들고, 영적인 신앙생활도 엉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용서'를 당장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보다 길게 바라보고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의 책임을 무작정 내일로 미뤄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그릇도 가늠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자신을 몰아대는 것이 훌륭한 답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의 성장이 필요하다. 그래서 당장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점점 나아질 계획을 가지라는 것이다.

나는 용서하기 전에 먼저 잠시 무관심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는 기대를 내려놓고, 민감해진 시선도 내려놓고, 잠시 자신과 그 상대방에게 시간을 좀 주라. 화가 나거나 섭섭한 마음을 가라 앉혀야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

그러니 용서하기 위해서 우선은 눈을 돌리라. 연이어 다시 또 용서해야 할 일들이 생겨나게 하지 말라. 용서는 숙제와 같아서 하나도 벅찬 경우에, 둘과 셋으로 늘어나면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그러니 그 사람을 위해서, 또한 나를 위해서 잠시 마음을 준비할 시간을 벌도록 해보라.

이제 조금 차분하게 되었다면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기도하라. 그러면 그 사람뿐 아니라 나를 위해서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덧붙여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결국에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의 운명이다. 

그러니 아무리 밉더라도 대놓고 내색은 하지 말라. 당장 용서하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너 밉다!’고 얼굴에 쓰지는 말라. 

이 충고를 듣지 않는다면 당신은 언젠가 몹시 부끄러울 것이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10-08-01 만남을 위해 기도하라



만남이 중요하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만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날마다 좋은 만남의 축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1999년. 당시 올림픽 대표 축구팀을 맡았던 허정무 감독은 선수들의 훈련을 위해 명지대 축구부와 연습경기를 가졌다. 그런데 그 경기에서 대표팀 선수 5명을 제치고 골을 넣는 명지대 선수를 발견하게 된다. 허정무 감독은 이후 10경기의 연습경기를 관찰한 후에 감독의 직권으로 그 선수를 대표팀에 차출했다.  그가 박지성이었다. 

박지성은 이후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히딩크 감독을 만났다. 그리고 월드컵 4강의 신화를 도왔다. 그 다음에는 히딩크와 함께 네덜란드 리그에 진출해서 챔피언이 되었고, 거기서 다시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한국과 서로 자웅을 겨루는 일본은 물론, 아시아에서는 그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축구 선수라는 것에 이견이 별로 없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을 중계하면서도 일본의 해설자는 박지성에 대한 부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그의 열정, 노력, 그리고 가능성은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과연 그에게 허정무 감독, 히딩크 감독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오늘이 있을 수 있었을까? 나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나, 한석봉의 어머니가 어둠 속에서 떡을 썰며 한석봉의 학문하는 마음 자세를 다시 가르쳤다는 이야기도 결국은 마찬가지이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만남이 있었기에, 그들의 특별한 재능도 새롭게 탄생하고 그처럼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나의 꿈을 이해해 주는 사람과 만나고 싶다. 내가 말하는 신앙, 교회, 인생에 대하여 공감하고 끝까지 같이 걸어줄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기도의 제목이 달리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부족함을 덮어주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도와주며 함께 내 마음의 꿈을 이루어갈 사람이 정말 필요하다. 

사람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아무리 탁월한 사람이라도 ‘같이’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오히려 능력이 부족한 사람 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 잘 만나야 하고, 또한 그 만남의 의미를 잘 살려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 안의 가능성이 폭발하게 되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나는 목회자로서, 좋은 만남을 위해 항상 기도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이 기도를 통해, 좋은 사람을 만날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좋은 사람이 되어 누군가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만남의 상대가 되도록 준비하라고 말하고 싶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결국 사람은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알아본다. 때문에 내가 그만한 수준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좋은 만남의 축복을 하나님께 받을 수 없다. 그것이 기도가 필요한 이유이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10-07-25 함께 고생해줘서 고맙습니다


서(猛暑). 그야말로 맹렬한 더위가 왔다.

33~37도를 넘나드는 더위는  하루 종일 냉수와 선풍기를 찾게 만든다. 얼음물을 아무리 먹어도 갈증은 풀리지 않고 몸은 가만히 있어도 기운이 빠진다. 1년 내내 더운 나라에서는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살까?

지난 월요일에 밖에서 일을 좀 했다. 식구들 자전거가 모두 고장이라서 나만 쳐다보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아내의 자전거는 앞 바퀴가 펑크가 났고, 준혁이 자전거는 밸브와 변속기에 이상이 생겼고, 찬혁이 자전거는 체인이 끊어졌다.

찬혁이를 조수로 데리고 자전거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아들은 그늘에 앉아서 손장난만 한다. 어차피 바퀴를 분해하거나 체인을 새로 조립하는 일에는 별로 도울 일이 없었다. 잔심부름을 몇 개 부탁하고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며 2~3시간을  일했다.

자전거 3대를 모두 고치고 집으로 올라와 샤워를 하고 차가운 냉커피를 한 잔 했더니 살 것 같았다. 아내는 내가 좋아하는 메밀 국수(소바)를 준비했다. 네 식구가 얼음을 넣은 쯔유국물에 곁들여 소바 1킬로(한 쟁반)를 먹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동훈 권찰은 매일을 이렇게 일하겠구나!’ 

(c.f. 전동훈 권찰은 현재 벤츠 일본 본사에서 막내 정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더위에 고생할 사람이 어디 전동훈 권찰 만일까? 아르바이트 하는 청년들부터, 하루 종일 외근을 주로 하는 최동현 집사님까지… 사실 동경의 여름은 힘들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는 계절이다.

그 노동과 땀 흘림의 대가로 교회가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사실 노동의 현장은 더위나 육체적인 피로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도 작지 않다. 그 모든 것을 무릎 쓰고 살기 위해, 그리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수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두 아실 것이다. 우리들이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한숨을 아실 것이다. 

그것과 바꾸어 가족을 부양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답고 귀한 일이다.

이 여름에 동경드림교회 식구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눈에는 언제나 여러분이 주인공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키며 살아가는 삶은 하루하루가 전투이고, 모험이다. 그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을 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우리 교회의 재산은 여러분이다. 목회자로서 건강을 잘 돌보기를 부탁한다.

덥다고 입맛을 잃어 대충 먹지 말고, 기운이 날 수 있는 음식 잘 챙겨 먹고, 동전 아끼지 말고 이온음료나 생수 충분히 마셔주고, 무엇보다 아침과 저녁으로 조금씩 운동을 해서 체력을 키워야 한다. 

함께 고생해줘서 고맙다. 길고 ,어렵고, 뼈 있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들어줘서 참 고맙다.  조금씩 좋게 변해줘서 고맙다. 우리 꼭 이 땅에 멋진 교회를 세워 주님께서 춤추시게 해드리자. 그 날을 위해 함께 땀 흘리자.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10-07-18 아, 왜 나는 변하지 못할까?



장마가 지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되는가 보다. 그래도 밤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점점 그 저녁의 경계마저 무너뜨리는 더위가 오고 있다. 

몇 년을 동경에서 지내고 보니, 이제 동경의 여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리 겁은 나지 않는다. 이렇게 시작된 더위가 10월 무렵까지 기성을 부리겠지만, 그래도 시원한 물에 샤워하고 선풍기와 에어컨을 번갈아 사용하며 견디면 또 순식간에 단풍이 들고, 겨울이 올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간다. 아이는 자라고 어른은 늙는다. 그 어쩔 수 없는 순리 앞에서 인생이란 참 작고 단순하다. 월요일부터 주일까지의 쳇바퀴를 돌고 또 돌면 달력이 바뀌고, 한 해가 가고, 세대가 교차한다. 

늙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늙기 때문에 인생의 가치가 빛난다. 

만약 늙지 않고 젊음과 건강을 마지막까지 누리다가 갑자기 죽어야 한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죽음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력이 떨어지고, 주름이 늘고, 머리카락이 하얀 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유한함을 경고 받는다. 그래서 삶의 아름다운 결말을 위해, 마음을 정돈하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유익을 얻게 된다.

인생에서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 나이에 합당한 경륜과 지혜를 배워가지 못하는 것이다. 참을성이 늘고, 본질을 보는 심안(心眼)을 가지며,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배려하게 되고, 이해심이 깊어진다면… 나이를 먹고 노인(老人)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예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이값’을 못하는 자신을 본다.

조급한 심정과 컨트롤이 되지 않는 분노, 잦은 감정의 기복, 핑계와 변명, 무책임과 게으름, 도전하지도 못하고 포기하는 패배주의, 열등감,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옹졸함, 야비한 웃음, 회피와 도망…

그래서 더위는 이런 인생의 숙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나를 지치게 하는 것은, 이런 나 자신에 대한 변화에서 너무도 지지부진(遲遲不進)한 현실이다.

그리고 나의 설교는 이 현실과의 싸움이다. 

물론 문제를 덮고 적당한 타협으로 살 수도 있다. 적당한 칭찬과 모호한 언어들은 듣기에 편하고 갈등을 일으킬 여지가 적다. 그러나 나는 내가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피하고 싶지 않다. 나의 설교는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나의 현실과 고민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은 거북하기도 하겠지만, 길게 생각하면 이 설교가 나와 나의 사랑하는 양무리들에게 반드시 유익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함께 변하자! 더 미루지 말고, 정직하게 우리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우리가 정말 싸워야 할 것은 계절의 더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10-07-11 진심으로 일본을 사랑하는가?



일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가?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인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정리되지 못한 과거사의 앙금이 가슴 한 쪽에 남아있기 때문이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미움은 항상 정당한 논리로 자기를 포장하지만 그래도 그 본질은 야만이다. 그 안에는 용서와 평화를 거부하는 호전성과 이유 없는 맹목적 분노가 있다. 

대체적으로 친절한 일본인들 사이에서 살면서도 가끔은 아주 기분 나쁜 경험을 한다. 

그것은 일본인을 우월하게 여기고 같은 아시아의 사람들을 열등하게 여기는 차별의 언행들이다. 조금 다행인 것은, 그래도 그 차별과 모욕이 점점 부끄러운 것으로 각성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해를 향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내가 당하는 차별이 싫기 때문에 나 또한 차별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내 마음에 일본을 향한, 일본인을 향한 차별은 없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지체들이 우리를 이 땅에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선교에 있다고 말한다.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미움을 극복하고 진정한 화해의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를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올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선교사가 되기 전에 먼저 용서와 화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일본이 잘 되는 것을 진심으로 축복하고, 내가 먹는 일본의 곡식과 열매에 대하여 감사하며, 일본인을 친구와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변화 없이는 복음을 복음으로 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이 결코 쉽지는 않다…)

우리가 건너야 할 시대의 강은 넓고 깊다. 어려서부터 들었던 일본을 향한 미움과 역사를 배우며 경험했던 분노도 깊지만, 우리가 이 땅에 와서 겪었던 차별과 현실의 부조리 또한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강을 건너 일본의 친구가 되어야 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야 한다. 말로만의 복음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자.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불신과 미신에 취한 이 땅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이 땅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구원의 강물이 힘있게 흐르기를 기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자. 

그 마음을 깨달아 갈 때에, 우리는 미움의 터널에서 나와 평화로운 미래로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을 고향처럼 살아갈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에 하나님의 축복이 꽃피기를 진심으로 축복하자.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10-07-04 평화, 누군가는 해야 한다


누구나 평화를 갈망한다. 

다정하게 손잡고 산책하는 부부관계와 사랑으로 충만한 자녀들, 그리고 직장에서는 신뢰와 선의로 가득한 동료관계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평화가 없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도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서 평화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직장이 충분한 보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최선이 없고 덜 위험한 선택, 곧 차악(次惡)이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직장이 좋아서가 아니라 가정보다는 편해서 직장에 남으며, 가끔은 그 직장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술이나 쇼핑과 같은 것으로 푼다.

이런 삶의 방식이 습관처럼 굳어지면, 결국에는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조차 서서히 죽는다.

평화 없는 삶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참 어리석다. 인생은 누구나 한 번 뿐이고, 그렇기에 스스로 소중해야 한다. 

포기해도 되는 것이 있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을 포기하려 하고 있다.


평화는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한 사람이 평화를 만들 때에, 그것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을 감싸 안는다.

평화는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다. 평화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가정과 직장에서 사랑과 보람이 채워지는 것이다. 평화는 한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존엄과 만족을 얻는 상태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가장 이상적인 조건이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주의하라! 평화는 기다려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일해야 한다. 

일하지 않고 평화를 가지려 하는 것은 운동 하지 않고 다이어트 하려는 시도 만큼이나 무모하고 어리석다. 

노동한다(일한다)는 표현은 참 아름답다. 그것은 땀 흘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선한 결과를 계속해서 기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수고의 결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평화는 결코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기 안에 평화를 이루고, 그 다음에 주변의 사람들과 평화하며, 마지막에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목표는 거룩하며 장엄하다.

평화를 깨뜨리는 자신의 문제를 짚어라. 자기를 지속적으로 개혁하라. 지금 평화를 위해 무슨 노동이 필요한지 생각하라. 희생이 없으면 평화도 없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10-06-27 용서, 위대한 선택



사람이 처음부터 불완전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피조물로 사람을 지으셨고, 그에게 영광을 더하시기 위하여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라는 값진 선물을 그만 타락하는 일에 사용하고 말았다. 이 선택의 결과로 사람은 죄가 주는 불행과 싸우는 길고 고된 시간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중심으로 인간의 역사를 보는 관점을 신학에서는 ‘구속사’라고 한다. 

‘구속(救贖)’이라는 것은 죄를 용서하여 구원한다는 의미이니, 결국 구원의 역사는 용서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자유를 타락에 사용한 사람을 용서하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처럼 긴 역사의 시간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처절한 희생을 하신 것도 역시 ’용서’를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었다.

용서는 아프다. 아픔이 없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용서는 간단하게 되는 법이 없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사랑의 마음을 위협하는 자기 안의 질문들과 싸우지 않고 간단하게 용서하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락을 통해 잃어버린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용서이기 때문이다.

죄가 사람 안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들을 파괴한다. 

죄와 하나님은 결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가 살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죽고, 하나님이 살면 우리 안에 죄가 죽는다. 그래서 죄는 필사적이다. 

특별히 죄는 용서를 파괴한다. 원한을 오래 품고, 더 열렬하게 미워할수록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은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용서하는 마음은, 죄를 무력하게 한다. 

당장은 분노하거나 미워할 수 있어도, 용서하면 그것이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지배하고 망가뜨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용서하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사 마지막으로 하셨던 기도 역시 용서의 중보였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자기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가 용서하시고 다시 제자로 세우셨다.

결국 용서 없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도, 본받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운명적이다.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이다. 용서하지 않을 수 없어 용서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덜 위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스스로 하든지, 타의로 하든지 어렵고 힘든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만 용서하라. 이유를 달지 말고, 그냥 용서하라. 

당신에게 용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대하게 만들고 싶어하신다는 뜻이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10-06-20 탓, 그 자기 함정



사람은 하나님께 창의적인 능력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 능력이 좋은 일에 사용될 때에 사람의 가치는 빛을 발합니다. 그러나 이기심과 욕망을 위해 발휘되면 사람은 가장 절망적인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더욱 나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는 것에 이 창의성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합리화, 핑계, 변명, 탓 등으로 불려지는 이러한 성향은 불편하게도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 아들의 모습에서 저를 반성할 때가 많습니다.

두 살 차이의 남자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다 보니, 둘은 대립과 갈등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둘의 사이가 특별히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침마다 둘이 사이 좋게 학교에 등교하는 모습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불거지면, 둘은 서로를 탓합니다.

언제나 자기의 반성은 없고 상대방이 문제를 유발했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나 더욱 강력하게 고발하면 고발할수록 그것은 본인들의 인상을 나쁘게 합니다. 왜냐하면 고발을 듣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그런 태도들이 아주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반성하고 상대를 덮어주려 한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중재할 수도 있을 터인데, 자기가 옳다고만 하니 얄미운 마음도 듭니다. 

두 아들을 통해 저는, 남의 탓을 하며 자기의 잘못을 변명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미련한 태도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보시기에는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모두 부족한 자녀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시지 않고 자비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자기를 반성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실수들을 관용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 탓, 환경 탓을 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이 나쁘게 행동한다고 하여서 은밀한 방식으로 보복하는 것, 혹은 똑같은 방법으로 응대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가인의 얼굴인 것입니다.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미움과 분노를 정당하게 해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은 설득하여 자기의 편을 삼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결코 이런 사람의 편이 되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 잘못에도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안아 주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정의 보다 큰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 |

2010-06-13 우리에겐 과거의 분별력이 필요하다



러시모어(Rushmore)에서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을 조각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조각가 지올코브스키(Korezak Ziolkowski)는 한 수우족 추장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것은 자신들에게도 영웅이 있었음을 알아달라는 간략한 편지였다.

타슈카 위트코. 수우족의 말로 미친 말(Crazy Horse)라고 불려졌던 추장.

인디언을 그 땅에서 몰아내는 전쟁이 치열했던 시절, 미국의 제7기병대를 대파하고 존 커스터 장군을 전사하게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체포되었고, 35살의 나이에 비참하게 죽었다.

지올코브스키는 1949년부터 휴대용 착암기를 하나 들고, 러시모어에서 27Km 떨어진 곳에 이 타슈카 위트코의 얼굴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인디언 말살의 역사를 사죄하는 의미로, 미국의 연방정부는 1천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지올코브스키는 거절했다.

오로지 기부금과 관광수입으로 그는 이 외로운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1982년, 지올코브스키는 혼자서 750만톤의 돌을 깨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끝은 아니었다. 그의 아내와 10명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일을 이어 받은 것이다.

드디어 1998년, 타슈카 위트코의 얼굴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말을 조각하는 작업이 계속 진행중이다. 높이 171m, 길이 201m로 예정된 타슈카 위트코의 조각상은 완성되기까지 앞으로도 100년이 더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묘하게도 러시모어의 위대한 대통령들을 이 타슈카 위코트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

마치 오늘날의 미국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기억하라는 듯이.

지올코브스키는 말했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려면 우리에겐 과거의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픈 과거를 따지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그들은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붙잡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과거를 제대로 기념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미래에도 과거의 실수가 그대로 재현되고, 정말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붙잡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일이 생겨난다.

타슈카 위트코는 증인이다. 미국이 서부개척의 시대에 인권을 짓밟고 유색인종을 차별했던 것, 심지어 말살하려 했던 것에 대하여 엄중하게 항의하는 증인이다.

더불어 앞으로는 결코 어떤 사람과 민족을 향해서도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고,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살인의 역사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경고이다.

타슈카 위트코를 오늘날에 다시 불러낸 지올코브스키의 삶도 참 감동적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인류는 위대한 것이 아닐까?

Posted by makarios
, |

2010-06-06 또 옥합이 깨어졌다!



한국에서 한 자매에게 전화를 받았다.

맑은샘교회를 담임하던 시절에 결혼준비를 말씀으로 도왔던 자매이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는 시댁과 남편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다가 결국에는 이혼했으며 지금은 아들과 둘이 살고 있다. 

싱글맘이 되었지만 그녀는 용감했다. 신앙을 붙들고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 그녀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대견했다. 그 강한 생명력이야말로 모성(母性)이며 신앙(信仰)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번에 다시 나를 놀라게 했다. 중국의 평신도 선교사로 헌신한 것이다. 중국의 청소년 사역에 크게 기역하고 있는 열방학교에 무보수의 간호교사 겸 사무원으로 자원하여 출국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함께 기도하며 헤쳐 나왔기에, 이번에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격려와 기도 외에는 없었다. 파송이 된 이후에는 조금이라도 후원을 시작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우리 사이에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때로는 불행이 축복의 통로가 된다. 편안한 삶은 우리의 열정을 소진시키고, 안주하게 하여서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만드는 때가 많다. 

그러나 불행은 살고 싶다는 갈망을 주고, 그 몸부림 속에서 치열하게 살다 보니 이전까지는 알지 못하던 인생의 보배들을 알게도 하고, 얻게도 한다.


한 여인이 자기 인생에 닥친 불행과 싸우기 위해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마치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과 같다. 그녀는 성경에 ‘죄 많은 여인’이라고 기록되었다. 그녀의 인생이 순탄하지 못했음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게 힘겨운 인생과 싸워 왔던 여인이기에 그녀는 예수님의 은혜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받을 수 있었다. 

삼 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통째로 붓고 옥합을 깨뜨리는 이 감동적인 헌신은 평범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행동이다. 너무도 외롭게 살아왔기 때문에,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이토록 절실했던 것이다.

나는 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쓰시기 전에 먼저 상처를 허락하신다는 것을.

그 상처들은 우리를 가난하게 한다. 주님 밖에 없다고 소름 돋는 고백을 하게 한다. 말이 아니라 흐느낌으로 주님과 대화하게 하고, 몸 밖에 드릴 것 없으니 이 몸뚱아리라도 받아달라고 헌신하게 한다.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을까? 유치원생의 아들을 데리고 중국의 선교사로 헌신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아팠을까? 결국 그녀의 옥합은 눈물을 견디지 못하고 깨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의 쓸데 없는 행동을 나무라고, 핍박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제 주님의 판단이 남았다. 

당신도 그녀가 낭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쓸데 없는 일을 했다고 하시겠습니까?


(눅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Posted by makario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