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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4.19 이것은 사람들의 피다
  2. 2020.04.19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
  3. 2012.09.02 기다리시는 은혜

 

 

2020-04-19 주일설교

 

사무엘하 23:14~17

(23: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23: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23:16)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23:17)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주보찬양PDF : https://bit.ly/2xqrn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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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9 목양칼럼

 

대한민국은 코로나19 상황 중에도 선거를 잘 치루었습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선거는, 민주주의의 보루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보수 기독교로 분류되는 일부 교회가 보여준 행태는 우려를 낳습니다. 오프라인의 부활절 예배를 강행하고 종교탄압을 외치며 여당의 낙선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협박이 그들만의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오프라인 예배를 비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각자와 각 교회의 생각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문제로 삼는 것은, 목사가 성도들의 투표를 좌우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입니다. 목사의 리더십이 성도들의 모든 결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는 착각입니다.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세상은 변하고 있고, 목사들의 영향력도 예전만 하지 않습니다. 마치 중세의 시대에는 사제만 성경을 읽을 수 있어 '성경적'이라는 말이 사제들에게 독점되었지만, 종교개혁을 통해 모든 신자들의 가정에 성경책이 보급되면서 비로소 '만인제사장'이라는 인식이 확대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앙생활에 관심과 열심을 가진 성도들은 이제 웬만한 신학이론들을 거의 이해할 만큼 교양적 수준이 향상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어도, 침묵할 뿐이지 무작정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의 설교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충분한 근거와 논리를 갖추지 못하면 설득할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에 목사들의 한 마디로 그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일사분란하게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목사 자신만이 아닐까 합니다.
달라진 시대에는 달라진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저는 목사의 역할이 축소되거나 퇴락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 만큼이나 교회의 패러다임도 변화가 요구되는 요즘이 아닐까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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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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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율법적인 태도가 싫다. 율법적이라는 말은 금지, 제한, 규제, 강제의 이미지를 가진다. 본래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상과 벌을 통해 선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폭력이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행동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은 일단 모순적이다. 죄를 지은 분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벌하지 않고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용과 용서의 뒤편에는 오히려 행동만이 아니라 그 정서와 생각까지 판단하는 치밀함이 숨어 있다.

 

예수님의 설교를 가만히 들어 보라. 율법이 살인이라는 행위를 정죄하였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살인의 원인이 되는 미움에서부터 이미 간섭하기 시작한다. 다만 그 미움과 살인을 인하여 사람을 포기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통하여 속사람을 새로 창조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때문에 복음은 필연적으로 인내의 기다림과 무제한의 투자를 동반한다. 설사 은혜를 깨달은 죄인이 회개를 하더라도, 그 회개가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정서를 충만하게 하기까지는 시간과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로교의 교리에서는 이를 ‘신자의 견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단 번에 완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변화라는 과정을 통해 다루어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의 신앙생활에서 사람들은 율법적 권위를 카리스마 혹은 리더십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신앙적 리더십이 신자들에게 금지, 제한, 규제, 강제를 효율적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세속적인 인사관리 형식을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차용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페널티를 가해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방식이 성경적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루시는 방법에서, 초대교회가 보여준 리더십에서 이런 모범을 찾아볼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목회자가 강한 책망으로 금지할 행위들은 성경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예루살렘교회가 이방인의 교회들을 받아들이며 제시했던 최소한의 요건들을 고려하더라도, 1세기의 초대교회는 매우 열린 사고와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관용적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탄생시킨 ‘복음’ 자체가 바로 관용의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자들이 설교를 듣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당장은 지지부진(遲遲不進)하고 답답하더라도 그런 과정을 통해 신자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책임감 있는 신앙을 성장시켜 가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걸려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지고 세상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는 든든한 신앙으로 세워질 것이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고 스스로 생각하라. 그 과정을 게을리 하는 자는 아무리 훌륭한 교회를 다녀도 결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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