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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목양칼럼 / 2014. 10. 28. 02:39



2014-10-28 목양칼럼


목회생활을 해오면서, 경험으로 깨닫게 된 오의(悟意) 중의 하나는 ‘대단히 신앙적인 모습에 전혀 신앙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신앙을 핍박하는 사람 못지 않게, 교회와 신앙에 대단한 열심을 가진 것처럼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위험합니다. 그들에게도 신앙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신앙은 자신의 신념과 일체화되어 있어서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신앙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십자가의 도를 훼방하는 전형적인 장애가 됩니다.

물론 자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편에 서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늘 자신들을 돌보시고 지켜 주시는 수호신(守護神)이 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사익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사적인 하나님(private-god)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성경은 더 이상 자기부인의 목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성경은 오직 그들의 욕망을 성취하는 길을 찾아내는, 이를테면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던 ‘점 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과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어버리면, 이야기는 끝이 난 것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핏대를 올린다고 해도, 그것은 가시나무새의 핏빛 울음이 아니라 혈기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엘리야가 와도, 바울이 와도, 심지어 예수님께서 오셔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듣기 원하는 목소리만 듣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로서 이런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의무는, 그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신성하고 근본적인 목회의 사역이지만, 이 경우의 기도는 전혀 교통하지 못하는 단절의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에게도 부담스러운 숙제가 됩니다. 

그래도 영혼은 귀하고 사람은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무엇은 시기상조(時機尙早)입니다. 오히려 시도할수록 더 깊은 상처의 기억을 남길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렇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는 이런 사람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습니다.

교회의 곳곳에 포진하여, 마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그 외식적 신앙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점령하고 이스라엘을 심판했던 것처럼,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보통은 교만한 자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는데, 이 이상한 신앙은 이기적이면서도 연대를 잘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허전한 영혼을 보상하기 위해서일지 모르지만, 매우 든든한 카르텔을 형성합니다. 그 연대의 자기편에서,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런 목사와 그런 성도들이 연대하는 교회는 최악입니다. 이것은 교회라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예배당을 장식하는 장식품일 뿐이며, 전혀 십자가의 도를 들을 수도,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들은 번영을 상징하는 황금 송아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 그들이 부르는 찬양, 그들이 선전하는 은혜는 모두 ‘황금’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적 배교(背敎)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함정이며, 우리가 조심해야 할 원수입니다.

하나님을 설명하고 성경을 해설하는 그들의 어법이 너무 초보적이고 어설픔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의 욕망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내면에서 영적인 진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설교를 통해 그들이 찾는 것은, 어떻게 하면 과연 하나님의 주머니를 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기술’입니다.


예전에, 저는 이들도 교회의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포함되는 사람들이라 여겼습니다. 나와 다르지만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수용하고 함께 손을 잡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사역자로서 내가 갖추어야 할 미덕(美德)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물이 기름과 섞일 수 없는 것처럼, 결국 그런 사람들과 내 신앙이 한 배를 탈 수 없고 멀리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그들의 성경에 대한 난독(難讀)이 이해되지 않았고, 그들은 나의 자기 부정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도구화 해버리는 강력한 자아를 건드리는 메시지는 불편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 충돌은 양보할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 싸움의 치열함 속에서, 그리고 저열한 사람의 바닥을 보는 경험들을 통해, 결국 이런 사람들이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복음 증거의 강력한 훼방자는 분명히 교회 안에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안방을 다 내어준지도 모릅니다. 가는 곳곳에서 경험하고 듣게 되는 이야기가 이런 심증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십시오. 시대가 악합니다. 우리는 변질된 복음과 황금 송아지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 숫자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 안에서 듣고 경험한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장 믿었던 것에서 가장 아픈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쉽게 갈 수도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십자가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 대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제 그 진리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성경 자체뿐입니다. 묵상이 없는 사람은 망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기 안의 진리를 갈고 닦지 않으면 우는 사자의 먹이가 되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사방이 어두워 자기 손조차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때에, 우리 앞길을 밝게 비춰주는 등불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그러니 다시 말하거니와, 성경에 생명을 거십시오.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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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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