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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07 믿음은 현재입니다.
  2. 2012.07.10 부활, 그리고 봄
  3. 2012.07.10 설교의 정서

 

2012-10-07 목양칼럼

 

신앙은 언제나 현재의 문제입니다. 과거의 영광을 자랑하는 것도, 미래의 할 일을 미리 예단하는 것도 믿음의 실체가 될 수 없습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겉을 화려하게 하고 허명(虛名)에 의존하는 것처럼, 믿음도 현재가 부실할 때에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에 거창한 일을 하겠다고 떠들어댑니다. 하지만 현재를 바꾸지 못하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당장 실행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환경과 능력을 핑계합니다. 그러나 정작 환경과 능력이 충분해서 믿음을 실행하는 일은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처한 세상은 우리의 믿음에 반대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일에 있어 우리의 능력은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역경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결정하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입니다. 때문에 믿음을 가로 막는 정확한 원인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믿음과 싸우는 또 다른 나의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좇는 과정 자체가 우리를 시험합니다. 믿음을 선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는 것은 믿음의 길에서 실패하는 것이며, 우리가 본래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선한 의도만이 아니라 믿음을 빙자하여 쉽게 성공하려는 잘못된 의도도 가졌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런 마음들은 믿음에 있어 불순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향을 제거하신 후에야 믿음의 열매를 풍성하게 주십니다.

항상, 현재를 전부라고 여기십시오. 사도 바울과 같이 이미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지금 최선을 다하십시오. 환경의 지배를 받지 말고, 마음을 확정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이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심은 자는 반드시 그 열매를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 믿음의 도리를 잡지 못하고 마음이 갈팡질팡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과연 나중이 어떻게 되는가 두고 보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관중(觀衆)의 입장으로 교회와 신앙을 방치하는 동안, 세월은 흐르고 인생의 황금 같은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중’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의 끝이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왜 모르십니까? 오늘이 믿음을 실천해야 하는 날이며, 하나님께 충성을 바쳐야 하는 기회라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의 헌신을 드리는 지금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에게는 다른 바램이 없습니다. 목사로서 한 가지, 바로 여러분이 지금 최선을 다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원합니다. 단 하루라도, 단 한 주라도 그렇게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것만이 나의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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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8 목양칼럼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 그리고 무덤에 놓인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누군가 훔쳐갔다고 생각했다. 부활에 대한 예고가 그렇게 많이 있었지만,아무도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예수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차례대로 예수의 무덤을 방문했다.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기적 중의 기적이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똑 같은 현실을 본다. 매주마다 성경을 강론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믿으라고 설교해 왔지만, 정작 사람들의 현주소는 무덤가 어슬렁거리기, 그 언저리다. 부활의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믿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기 보다는, 믿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무력함을 본다. 그래서 슬프고, 안타깝고, 아프다.

목회를 한다는 것은 그 짐을 대신 지는 일이다. 양을 비난하는 목자는 없다. 설사 잠시 책망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 양의 문제가 목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의 실천을 위해 십자가에 오르셨다. 그분의 모범을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목자의 길에 들어선 목회자라면,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이 역설적인 진리를 엄숙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양들이 무덤가를 어슬렁거리는 무력함의 책임은 목자에게 있다.

다시 말한다. 예수의 부활은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부활이다. 예수가 고난의 십자가를 진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성경에 쓰여 있다. 그 고통의 크기와 넓이만큼 반대로 우리는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때문에 성경은 곳곳에서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항상 험난한 고생과 위기를 겪는다. 그러나 안심해도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은 안전하다. 그가 없는 영화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은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반드시 잘 되게 되어 있다. 믿음을 가지고 제대로만 산다면 결과는 이미 보장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다.

그러니 무덤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생명이 넘실거리는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시체가 아닌 예수를 만나라. 다시 사명을 받으라. 다시 사랑을 확인하라.

성경을 펴고 새벽을 맞는다. 어스름한 새벽 빛이 창가에 스민다. 아직은 싸늘한 기운이 냄새처럼 온 몸에 풍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겨울은 가고 봄이 오고 있다. 부활절은 항상 그 변화의 무렵에서 나를 깨닫게 한다. 예수는 이미 세상을 이겼다. 때문에 나도 이길 것이다. 그것은 찬바람이 어쩔 수 없는 봄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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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정서

목회/목양칼럼 / 2012. 7. 10. 19:19

2012-01-08 목양칼럼

 

설교는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과 다른 한 손에 신문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한 ‘신문’이 지금은 인터넷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성경을 들고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설교의 실체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설교자들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험과 율법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같은 설교자로서 그 이면에 숨겨진 제3의 요소를 발견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긍휼과 사랑, 그 정서가 없는 설교를 나는 성경에서 단 한 편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라고까지 불려지는 것이리라.

설교가 막힌다. 물론 새로운 지식의 충전도 필요하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신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시대적인 흐름을 읽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히려 부수적이다. 나는 설교야말로 연애의 감정 속에서 태어난다고 믿는다. 자기가 인도해야 하는 양떼를 향한 한없는 사랑의 정서와 무한한 책임감… 그 사랑이 없으면 그야말로 설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그것이 문제이다. 부부도 평생 사랑하는 것이 힘든 것이 세상이고 사람이다. 그런데 하물며 온갖 오류의 가능성과 문제 속에서 만난 목회자와 신자가 서로 변치 않는 사랑을 해나가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니 헤어짐이 흔하다. 하지만 헤어짐이 능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이것은 비슷한 양상의 문제로 재발하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랑하기 힘든 신자를 교회 밖으로 내보내도 다시 또 그런 신자가 찾아오고, 사랑하기 힘든 목회자를 떠나도 다시 또 그런 목회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 이를 어쩌랴!

비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를 통해’ 만나는 것이다. 설교자도 예수를 통해 신자들을 만나고, 신자들도 예수를 통해 설교자를 만나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의 허물과 과오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we)’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풍성한 사랑의 정서를 누릴 수 있다.

나는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기도한다. 그 길만이 내가 스스로 설교에 실패하지 않는 길이라 믿는다. 신자들에게 더 좋은 설교를 먹이고 싶은 갈망으로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강단에 서면 진지하고 따뜻한 눈빛과 열정으로 자기에게 부어진 은혜를 쏟아내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이것은 나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설교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설교에 진정한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설교는 강연이 아니다. 설교는 공명(共鳴)이다.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가 설교자의 외침을 통해 증폭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오늘 설교에는 ‘아멘’이라는 소리가 자주, 그리고 커졌으면 한다. 그것은 설교자 개인에 대한 찬동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탄성이며, 감동이어야 한다. 이 비밀을 아는 자라야 비로소 설교를 들을 자격이 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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