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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1


오바마 대통령이 공무를 시작한 이후에 가장 시급하게 처리한 일중의 하나가 쿠바에 있는 관타나모 미군기지의 수용소를 폐쇄한 일이었다. 이와 함께 오바마 대통령은 모든 정보기관과 군에서 고문을 금지시키는 명령에도 서명했다. 이 자리에는 퇴역한 미군 장성들이 초대되어 함께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관타나모 미군기지의 수용소에 대하여 ‘미국의 수치’라며 그것을 없앨 것을 계속해서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한국에서는 엄동설한에 철거민을 향하여 물대포를 쏘며 경찰 특공대가 투입되었다가 화마(火魔)에 인명이 많이 상하고 6명의 고귀한 목숨이 죽는 일이 발생했다. 물론 이 일은 고의는 아니었다. 그리고 경찰과 철거민 모두가 피해자라는 사실에 대하여도 어느 정도 이해를 같이 한다. 하지막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아니라, 우리의 불행한 현실이 투영된 사건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삼가 고인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합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공화당이 원래가 보수적이고, 또한 기독교 인물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미국은 교회가 공화당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반면에 ‘자유’를 강조하는 민주당은 상대적으로 교회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 독실한 크리스천 대통령이 고문을 허용하고, 인권을 위협하는 무법적인 수용소를 만들고, 남의 나라를 침공했었다. 이라크 침공은 명백하게 있지도 않았던 대량살상무기를 가정하고 저질렀던 일인데, 제대로 사과하거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결국에는 퇴임했다.

한국도 그러하다. 교회의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었다. 연설마다 성경구절을 연상시키는 말씀을 사용하고 국민의 종복(從僕)을 자처했다. 하지만 사회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자유는 축소되며, 가난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 모순의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노로 일관하기 이전에 우리는 이것이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시대로부터도 태어난다. 한 사람의 가치관은 그 시대의 정신과 무관할 수 없으며, 특별히 '대통령'과 같은 상징적인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미국과 한국의 시대 정신이 무엇을 추구하고 중요하게 여겨 왔는가를 생각해보면, 오늘의 현실은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시대 속에서 '교회'는 교회다운 성경의 길을 버리고 대중과 영합하거나 권력에 아부하여 세속적으로 형통하는 길을 택해왔다는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성경을 전하는 자도, 받는 자도 모두 눈이 멀었다. 어느 신자에게 '부흥'이 뭐냐고 물었더니 목사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겠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것이 우리의 과거이고 현실이다.

때문에 성경을 인용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가난한 자를 버리며, 욕망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전혀 그것을 신앙적 배반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받는 사회적 지탄을 '핍박'과 '순교'로 주장하기까지 한다.


회복의 기회는 있다. 그러나 나는 '선거'가 그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거는 현실이고 수단이다. 물론 그것이 중요하지만, 나무를 든든히 하려면 뿌리를 살펴야 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하려면 사람들의 정신을 정의로 젖먹여야 한다. 그 과정이 축적되어 한 시대를 꽃피우고 사람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선다. 건강한 교회가 희망이다. 교회부터 십자가 아래의 신자들을 바른 대통령 감으로, 장관 감으로 키워야 한다. 시대가 순응하고, 사람들이 흠 잡을 수 없는 준비된 일꾼들을 배출하여 사회의 물을 맑게 해야 한다.


우찌므라 간조로부터 성경공부를 했던 일제 치하의 한국 기독유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조국인 조선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아쉽게도 그들의 곁가지가 후일 <무교회주의>를 낳아 이단의 시비를 받았지만, 따지고보면 그것 또한 망국의 현실에서도 교권에만 집착했던 정치적 교회에 대한 깊은 실망이 낳은 결과였다. 아무튼 그들의 심정은 순수했고 신앙 또한 깊었다.

그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이 김교신 선생과 함석헌 선생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었던 역사적 기독교 잡지가 바로 <성서조선>이다. 이 유학생들의 간단한 신앙잡지는 두고두고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그 창간사를 여기 옮겨 본다.




성서조선 第 1 號 (1927年 7月)


하루 아침에 명성이 세상에 자자해진 것을 알아차렸던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은 매우 행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루 저녁에 "아무리 해봐야 조선인이로구나!" 하고 연락선 갑판을 발로 구른 자는 둔한 자였다.


나는 학창시절에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면서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 하며 스스로 위로했었다. 장엄한 회당 안에서 열화 같은 설교를 들을 때에도 수없이 감사했다. ‘온 세상이 형제 동포’ 라는 말을 순진하게도 믿었다. 

일본의 양심 있는 애국자 몇몇이 ‘제 2 국민’ 이었던 우리 조선인을 가르치려고 식사도 잊고 몰두하는 것을 보면서, 나의 계획은 원대함에 이르렀다. "옳은 일을 하는 데야 누가 시비를 하랴?" 

과연 학문적 야심에는 국경이 보이지 않았다. 사랑으로는 온 세상이 가슴 속에 있었다. 이상을 실현해 보자는 나의 앞 길은 양양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들리는 한 소리는 무엇인가? ‘아무리 그래 봐야 너는 조선인이다!’

아!   어찌 이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갖는 말이 또 있으랴?    이 뜻을 깨우치니 모든 것이 헛되었다. 또한 이 헛됨을 이해하니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드디어 눈빛은 빛났고 그 초점은 하나로 명확해졌다. 우리는 감히 조선을 사랑한다고 큰소리 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선과 나와의 관계에 대하여 겨우 ‘그 어떤 무엇’ 을 알게 되었다. 너무 늦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웃을까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며 조선을 위하여 무엇을 꾀할까? 오직 슬픔과 분노로 세상을 개탄하는 것만이 최선일까?! 요즈음 우리 동포들 사이에 평소의 사상과 취향이 다르더라도 서로 자기를 굽히고 같은 목표를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우리가 함께 기뻐할 바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 효성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우리 같은 불효자들이야 두 말해서 무엇 하랴? 상황이 기적을 행하는가 보다.

다만 아무리 같은 사랑이라도 그 표현의 방법이 서로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 동안의 경험과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오늘의 조선에 줄 가장 귀한 선물은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신.구약 성서’ 한 권이라고.

 


그리하여 같이 모여 걱정하고 같은 소망을 가진 어리석은 친구 대여섯 명이 동경 시외에 있는 스기나미 마을(杉竝村)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졌고 ‘조선성서연구회’를 시작하였다. 매주 때마다 모여서 조선을 염려하고 성서를 공부하면서 지내 온지 반 년 남짓 지났을 때, 누군가가 그 동안 스스로 연구했던 것의 일부라도 세상에 공개할 것을 제의하니 그 이름을 ‘성서조선’이라 하게 되었다. 

그 이름이 좋은지 나쁜지, 그 시기가 적절했는지는 우리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낼 제일 좋은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의 하나를 버릴 수 없어서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소원하기는 이를 통해서 뜨거운 사랑의 순정을 전하려는 것이며, 정성을 다한 선물을 그녀에게 드리려는 것이다.


‘성서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사람(外人)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예배당를 중요시하는 사람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교 신자보다는 조선의 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골로 가라, 거기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을 너의 사명으로 삼으라.


‘성서조선’아, 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 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한 세기 후에 동지가 생긴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일제의 암울한 시대에서 사랑하는 조선을 위해 성서를 주고 싶다는 젊은이들의 열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니, 그들의 탁월한 이성 앞에서 우리의 수준 낮은 욕망들이 부끄럽지 않은가? 지금 이 시대에도, 대한민국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제대로 먹여서 신앙적 가정을 일으키고, 사회를 개혁하고, 나라를 바꾸어야 한다.

부자들을 위한 저속한 기독교가 아니라,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만민'을 위한 보편적 기독교를 교회로부터 부활시키는 것만이 이 시대의 희망이 아니겠는가!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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