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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15 목양칼럼


사람은 변한다. 긍정적인 변화를 '성장'이라고 하고, 부정적인 변화를 '퇴보' 혹은 '변질'이라고 한다. 사람의 인생에는 양편의 가능성이 모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 노력은 비단 혼자만의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정체감의 고정화'라는 것이 나타난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정체감'이라는 것을 가지게 된다.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라가는 과정 속에서 습득하고 생겨나는 것이다. 이 정체감은 '관계'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아이들의 정체감에는 부모의 그늘이 짙다.

부모가 아이를 '너는 아주 나쁜 아이다'라고 말해주면, 그것이 아이의 무의식에 고스란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자기의 정체감을 '나쁜 아이'라는 상처 속에서 고정시킬 수 있다. 이 의식은 두고두고 그 아이의 인생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파괴력을 나타낸다.

물론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이 모두 부정적인 정체감에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불우한 정체감도 극복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긍정하고 좋은 평가를 통해 기대하면, 그 기대가 서서히 어린 시절의 상처 받은 정체감을 치유하고 스스로 '유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정체감을 생산한다.

세월은 뒤로 돌릴 수 없다. 유년시절의 불우함만을 탓해야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부모라고 의도적으로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부족하고 모순적인 것이 인간이다. 때문에 상처 없는 아이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상처 받은 사람들을 긍정의 빛으로 끌어내고 변화시키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교회는 왜 공동체여야 하는가? 하나님은 왜 예배의 찬미를 기뻐하시는가? 난 기독교 예배야말로 가장 극적인 '긍정'의 최상급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조차 잠(sleeping)으로 이해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최선을 다하여 칭찬하는 것이 예배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찬미는 긍정을 낳고, 부정을 파괴한다. 우리는 이 예배의 은혜 속에서 죄인을 '죄인'으로 고정하지 않고 '형제'와 '자매'로 긍정하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유년을 치료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도가니와 같이 '우리'를 녹여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결국 이 치료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공동체적인 변화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나는 묻고 싶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전한 기대와 미소로 격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모두 차별받고 있다. 그들의 현재만이 세상적인 평가의 기준이다. 그들이 과거에 어떤 상처를 받았든지, 어떤 어려움을 겪었든지 별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나에게 방해가 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결과를 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가치는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소망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더 긍정적으로) 여기고, 우리의 소망을 이루실 주님을 찬미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축복해야 한다.

이러한 소망이 과거의 사슬을 끊고 죄인을 구원한다. 그들의 상처받은 정체감을 치료하고, 세상에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무익하던 사람에게 세상을 유익하게 살 수 있는 기회와 용기를 제공한다.

하나님을 믿는가?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변화시킬 사람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믿어라.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곁의 사람들을 그런 눈으로 보아야 한다. 아내를, 남편을, 같은 교회의 교우들을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은혜받은 사람의 표지이다. 

명심하라. 당신이 누군가를 '몹쓸 사람'으로 단정짓는 순간, 그 사람은 정말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고 당신은 그의 '퇴보'에 분명히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파괴하도록 모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구원하고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제 그 일을 행하라. 그 일을 위해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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