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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0 목양칼럼 

 

전에도 느껴왔던 사실이지만, 위기는 진짜 얼굴을 드러나게 한다. 
코로나19의 상황에서 한국의 교회가 보여준 사회적 책임감과 현실감각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이번에도 그랬다. 소규모 교회모임을 통해 바이러스가 번져갈 때에, 교회를 통해 터져나온 소리는 결코 교회답지 못했다. 
지난 7일 <중앙일보>에 '예배 봐도, 안봐도 망한다… 코로나에 개척교회 생사기로'라는 기사가 나왔다. 
소수의 인원으로 간신히 버티는 소위 '개척교회'의 경제적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아니, 아는 바가 아니라 지금도 내가 체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기사의 이면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목사들의 입장은 무척 송구하다. 방역을 위해 당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연보가 없어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볼멘 소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의 안전을 다소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종교에서 돈에 대한 집착이 화두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인들의 태도에 분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3:16~17)
(23: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23: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신약의 교회는 각각의 교인들이 걸어다니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가르쳤다. 그 결과 기독교는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영성을 깊이 추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임대료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것과 교인 한 사람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 중에서 무엇이 더 목회에 치명적일까?

일본에 와서 몇 년을 높은 임대료에 시달렸다. 그야말로, 교인들이 모두 허리가 휘도록 연보를 드렸지만, 목사는 먹을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예배의 장소를 유지하는 것이 교회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왔다. 2011년도 대지진 때에 교인들 대부분이 흩어지면서 임대료 감당이 당장 불가능해진 것이다.
더 이상  장소를 빌릴 수 없었던 그 시절에, 나의 결정은 내가 사는 집으로 교회를 옮겨온 것이다. 그리고 수 년 동안 그렇게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이 주일 아침에 와서 저녁에 가기까지 찬양하고, 아이들은 뛰고, 사람들은 시끄러웠다. 결국 집 주변에서 불만이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알아보고, 공공기관의 교실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다. 공공기관이라 1년의 몇 주는 주일에 휴관을 했다. 그리고 공적 행사가 있을 때에는 교실의 대여가 불허되었다. 그럴 때에는 다시 목사의 집으로 모이거나, 아예 야외일정을 잡아 야외예배를 드렸다. 
이런 방식의 적응은, 한 가지 각오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은 교회를 연보가 아니라 교인들의 믿음으로 세우겠다는 각오였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기도했고 지금도 기도하는 바이지만, 만약에 이렇게 하여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 때는 나도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각오였다.

목사들은 부흥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종종 그 부흥은 개인적인 '성공'과 구분되지 못한다. 그러나 진정한 부흥은 목사가 실패하고, 교회가 망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진정한 믿음을 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동경드림교회가 문을 닫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 동경드림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만났던 소중한 추억이 살아있고, 그래서 평생 어디에 가서든 그 시절의 신앙생활을 잊지 못한다면,  나는 동경드림교회의 간판이 어느 건물에 붙어 있든지, 혹은 없든지 상관없이 그것이 우리 교회의 부흥이라고 생각한다.

교인들은 목사의 맘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알게 된다. 이것이 30여년 목회의 길에서 배운 교훈이다.
비록 목사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교인들은 없더라도, 결국 목사의 설교와 결단은 교인들에게 그가 추구하는 신앙의 비전과 인격을 드러나게  만든다. 무서운 일이지만, 이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인격의 감화는 말이 아니라 세월에서 나온다. 목사가 교인들의 곁에서 인내하며 평생을 살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가? 아니면 더 귀한 것이 돈인가? 명예인가? 성공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리고 이 대답이야말로 나는 목회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한 사람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에 대하여 죄의식이 없는 사람은, 천하를 위험하게 하고도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늘 한 사람의 가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한다. 
나는 그것이 교회이고, 목회라고 생각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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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5 목양칼럼

 

다른 사람을 향하여 참아주는 것보다 가족을 향하여 인내하는 것이 더 힘이 듭니다. 그래서 의외로 밖에서는 친절하다는 평판을 들으면서도 정작 가족에게는 매정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모두 이중적인 사람일까요?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친절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도는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의도가 얼마나 행동으로 실천될 수 있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보여주는 것은 쉬운 편입니다. 그리 오래 보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게 중요한 사람들도 아니니까요.
그러나 가족은 다릅니다. 가족은 간섭의 끝판왕들이죠. 나름 그럴 만한 자격과 권리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선을 넘는 행동들이 자행됩니다. 그런 사람들(가족)을 향하여 '친절'한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가족을 대하는 방식이 곧 모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친절이든, 배려이든간에…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가족에게서 시작되고 가족에게서 완성됩니다. 그래서 어떤 가정의 분위기에서 살았고, 살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대인관계와 사람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본래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사람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훈련을 통해 성장하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교양적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매너'의 기본과 뼈대는 모두 가정에서 만들어집니다. 특별히 식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식구들에게 잘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식구들에게서 유대감을 느끼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사회의 관계를 잘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내면적으로는 단절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식구'는 호적에 함께 이름이 쓰인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 주고 받는 관계 속에서 일체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식구에게 참기 힘들고 식구라서 친절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식구에게마저 친절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쌓아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반드시 이것을 주의하여 가르쳐야 합니다. 
아빠니까 무례해도 괜찮고 엄마라서 무시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아빠와 엄마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가 무르익어 아이들이 친구들과도 좋은 관계를 풍성하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방을 쓰는 자기 형제에게조차 배려하지 못하면, 앞으로 사회 생활 속에서 만나지는 수많은 무뢰한들을 어떻게 참고 극복하겠습니까? 참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폭발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평온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오묘한 긴장감과 균형이 갖추어질 때에 비로소 가정에서 잡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 결국에는 '관계'라는 어려운 숙제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더하기를 못하면 곱하기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더하기도 익숙하지 못한 아이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은 원하는 답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결국 아이는 수학의 재미를 잃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식구들과의 관계도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해낸다는 것은 과장이요, 억지입니다. 어떻게 대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답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그 과정을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결국 행복할 수 없습니다. 늘상 '인간관계'의 부담 속에서 살지만 정작 사람과 사람이 사귀고 연대하며 공감하여 누리는 풍성한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절입니다. 가정마다 갇혀서 식구들끼리만 함께 지내면서 나름 스트레스도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혼율이 늘었다고 하고, 더러는 가정내 폭력사건까지 생긴다고 듣고 있습니다. 아마 아이들도 스트레스가 많을 것입니다. 부부들도 부담이 적지 않을 것이고, 형제들간의 긴장감도 높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의 실상을 보고, 확인하고, 고쳐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가족이 얼마나 건강한지, 어디가 약점이 있는지, 그리고 이 약점을 앞으로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한 가지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바탕은 '물질'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때문에 부부가 서로 잘 지내는 것, 형제가 우애 있는 것, 가족이 함께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고, 듣고, 느끼게 해주는 것보다 더 훌륭한 유산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 어려운 시절이 그런 유산을 잘 갈무리 하는 기회로 쓰여지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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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3 목양칼럼

 

꿈 같은 시절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좋은 꿈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전혀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곤란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2020년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일상이 찾아올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팬더믹)으로 국경은 봉쇄되고 사람들은 집에 갇혔으며, 아이들은 교육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이 곤란한 상황이 지나가고 다시 일상의 자유를 맞이할 수 있을지 예상도 쉽게 되지 않는 요즘입니다.
갑자기 닥친 이 시련은, 국가의 리더십을 시험하고, 개인의 성품과 인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적당하게 감추어졌던 우리의 속모양들은, 이제 감출 수 없는 지루함과 두려움, 이기심 속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의 유익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세계의 공장들이 멈추어 서자 바다가 살아나고 철새들이 돌아오는 것처럼, 이 코로나19는 식구들이 다 모여 매일 저녁을 먹는 일상을 강제했고, 또한 우리 자신의 실체를 돌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정원사들은 이른 봄에 가지치기를 합니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이제 봄기운을 좀 받으려는 나무들에게 가혹한 가위질을 하는 것이 조금은 안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때가 가장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봄은 정열적인 생명으로 나무를 다시 살려놓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른 봄에는 거침없이 가위질을 해도 무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어려움은 지나갑니다. 사실 모든 어려움이 그렇습니다. 저는 이 분명한 원칙 속에 하나님의 자비가 깃들어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 원칙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통해 부실한 가지를 잘라내고 자기를 더 건실하게 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부수적인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부수적인 것들을 너무 많이 용납하고 연연하는 동안 우리의 정신은 혼잡해지고 마음은 어수선하게 됩니다. 때문에 가끔은 부수적인 것들에게 선을 그어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꼭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 확실한 결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꿈처럼 일상이 멈춘 지금이 어쩌면 그렇게 자기를 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휴가는 계획을 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닐테니까요. 어쩌면 우리의 평생에 다시는 없을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조용한 사색과 기도와 독서와 글쓰기의 시간을 권합니다. 가족과의 대화는 많이 하시되, 가끔은 그 대화로부터도 좀 떨어진 여러분만의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지나온 여러분의 시간과 앞으로 걸어갈 여러분의 시간을 헤아려 보십시오. 사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라도 그것을 아껴 사용하고 후회 없는 인생이 되도록 세밀한 조정이 필요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목적이 있는 삶을 희망했습니다. 치열하게 살아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산다'는 말의 의미가 묵직하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잘 산다는 것은, 젊은 시절에 생각했던 거창한 것들보다 훨씬 작고 소소한 것들에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규칙적으로 산책하고, 혈압을 체크하고, 커피를 마시고, 몇 글자의 글을 쓰면서 혼자 생각하고, 지난 사진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짓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그리고 다시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를 손질하며 미래를 지긋이 전망하는 것… 그 자체로도 눈부시게 아름답고, 대단하고,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의 내용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우리 안에 욕심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욕심은 쓸데 없는 걱정과 염려로 이어지고, 그래서 우리 마음은 쉴 틈이 없습니다. 산다는 것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계획이 없는 인생도 무모하지만, 너무 계획에만 매달리는 인생도 갑갑하고 힘든데… 우리가 덜 중요한 것을 잡고 놓지 못해서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고민이 됩니다.
답은 각자의 몫입니다. 그 대답에  따라 다른 인생을 살아갈 것이고, 그 인생의 결과 또한 각자가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 목사로서 저의 역할은, 이런 것들을 제시하고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인생의 결정권은, 결국 그 주체로서의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때문에 그 결정에 대하여 '권면'은 하겠지만, '주장'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과 같이, 잘못된 결정을 하는 것보다 나쁜 것은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결정이라도 했을 때에는 그 결과를 책임지고 다시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갈 수 있지만,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며 인생을 낭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아니라면 실패도 인생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래서 신중한 것과 우유부단한 것은 다르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신중은 마지막까지 골몰하되 반드시 스스로 결정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반드시 스스로 져야 하겠지요. 결정과 책임은 언제나 별도의 내용이 아니라, 하나의 세트메뉴라는 것을 아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유부단은 결정하지 못할뿐 아니라 책임지지도 않는 태도입니다. 어쩌면 책임지지 않기 위하여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이 우유부단의 실체일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지금은 잘 사용해야 하는 기회입니다. 흔치 않은 시간입니다. 인생에 다시 없을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에게 안전하고, 건강하며, 유익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제가 대답할 내용이 아니라, 여러분이 찾아야 할 여러분만의 숙제입니다. 모쪼록 그 숙제를 잘 하기를 곁에서 응원하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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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9 목양칼럼

 

대한민국은 코로나19 상황 중에도 선거를 잘 치루었습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선거는, 민주주의의 보루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보수 기독교로 분류되는 일부 교회가 보여준 행태는 우려를 낳습니다. 오프라인의 부활절 예배를 강행하고 종교탄압을 외치며 여당의 낙선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협박이 그들만의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오프라인 예배를 비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각자와 각 교회의 생각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문제로 삼는 것은, 목사가 성도들의 투표를 좌우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입니다. 목사의 리더십이 성도들의 모든 결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는 착각입니다.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세상은 변하고 있고, 목사들의 영향력도 예전만 하지 않습니다. 마치 중세의 시대에는 사제만 성경을 읽을 수 있어 '성경적'이라는 말이 사제들에게 독점되었지만, 종교개혁을 통해 모든 신자들의 가정에 성경책이 보급되면서 비로소 '만인제사장'이라는 인식이 확대된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앙생활에 관심과 열심을 가진 성도들은 이제 웬만한 신학이론들을 거의 이해할 만큼 교양적 수준이 향상되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어도, 침묵할 뿐이지 무작정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의 설교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충분한 근거와 논리를 갖추지 못하면 설득할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에 목사들의 한 마디로 그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일사분란하게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목사 자신만이 아닐까 합니다.
달라진 시대에는 달라진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저는 목사의 역할이 축소되거나 퇴락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 만큼이나 교회의 패러다임도 변화가 요구되는 요즘이 아닐까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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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마음

목회/목양칼럼 / 2020. 4. 12. 08:42

 

2020-04-12 목양칼럼

 

누가 승리합니까? 간절한 사람이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억울한 과부의 사건을 듣고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재판관을 찾아가 호소하자, 마침내 재판관이 그렇게 말을 했답니다. "내가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지만, 당신은 너무 귀찮아서 억울한 사연을 내가 풀어줄테니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

사람은 간절할 때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에는 기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포기할 있다면, 이미 간절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간절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지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이길 때까지 도전할테니까요. 이미 그의 마음에서는 승패가 갈린 것입니다.

코로나19 엄혹한 현실을 지나면서, 내가 인생에서 과연 무엇을 그토록 간절하게 붙잡아 왔던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밋밋하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정말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닐까…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간절하면 기도합니다. 간절하면 노력합니다. 간절하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간절하면 우리 삶은 느슨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절망할 시간이 없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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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목양칼럼

 

우리교회 김해영 집사님은 아침에 마트 앞에 2시간을 줄 서서 겨우 마스크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사카에 있는 한 한국인 자매가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서 출퇴근 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도움을 주면 좋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그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어, 어렵게 구한 마스크를 우편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결국 감사의 연락을 받았지만, 그런 공치사를 바래서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내도 일터에서 같이 일하는 분이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난처해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아내가 임신을 한 몸이라 오래 줄을 서서 마스크를 구매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아내는 자기의 마스크를 나누어 임산부를 위해 보냈습니다. 역시 감사하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그런 인사를 바래서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위기는 우리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착한 일을 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평소에는 작은 것도, 위기에는 큰 감동과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됩니다.

사랑을 담은 반찬 한 가지, 마스크 몇 장, 격려의 말이나 글, 안부전화… 모든 것이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는 요즘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의 주변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말씀해주시는 바를 실천하십시오. 또 누가 알겠습니까? 이 위기가 여러분에게는 큰 축복의 기회가 될런지… 꼭 그렇게 되기를 목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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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6 목양칼럼

 

벚나무가 꽃을 떨구며 싱싱한 푸른 옷으로 갈아입는 요즘입니다.

조그만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음으로 공원을 누비며 꽃도 보고, 새소리도 듣고, 바람도 느끼고 싶은 봄인데... 이번 봄은 너무도 잔인하게 질병의 공포와 싸우며 보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만 갇혀 지내다보니, 갑자기 <안네의 일기> 생각났습니다.

유태인 소녀, 안네는 13살에 일기장을 선물받게 됩니다. 일기장에 '키티'라는 이름을 붙이고, 소녀의 소소한 일상을 적어나갔습니다. 유태인 가족에게 나치 독일의 강제징용 출석요구서가 날아오게 되고, 그때부터 가족은 은신처에 숨어 답답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가족은 194484일에 나치의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 보내졌고, 안네는 다음해에 15살의 나이로 그곳에서 병사했습니다.

안네의 일기장은 후에 발견되어 2009년에 유네스코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일기장에 안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자기 안에 숨어 있는 행복을 다시 끌어내기 위하여 노력하세요. 그리고 주변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다면 행복은 당신의 곁으로 다시 찾아와 줄겁니다."

 

 

우울함과 고통 속에서 용기를 가지려고 싸웠던 사람은 우리만이 아닙니다.
13살의 소녀도 희망을 잡고 노력하다가 별이 되었습니다.
아직 우리는 정도로 힘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엄살 부리지 말고, 일기장에 다짐이라도 적으면서 힘을 내어 봅시다.
우리가 다시 용기를 가지면, 안네의 글처럼, 행복은 다시 우리들 곁으로 것이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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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1 목양칼럼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의 구별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복종할 것이고, 없는 것은 창조될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로운 지경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이성은 이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작고 초라하며 보잘 것 없습니다.
온 세상이 코로나19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 백, 수 천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은 우리를 너무 간절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온 세상이 멈추고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이제 각자의 집에서, 자기의 나라에서 고립된 사람들은 언제 다시 자유로운 여행과 만남을 계속할 수 있을지 갈망하고 있습니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로 인하여 인간의 사회가 전 세계적으로 이처럼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스스로 위대해진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내포하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께서 이 질병의 치료제도 허락해 주시기를… 그래서 다시 부모와 자식이 만나고, 국경이 열리며, 예배가 계속되고, 삶의 소소한 일상과 행복들이 우리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 다짐합니다. 이제 다시 은혜로운 일상을 찾는다면, 그것들에 대하여 더욱 감사하고 소중하게 여길 것을. 사랑하고 또 사랑할 것을. 무엇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지렁이 같은 야곱이며,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며, 들판을 맴도는 아침의 안개일 뿐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의 교만을 치유해 주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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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

목회/목양칼럼 / 2020. 3. 20. 17:37

 

 

2020-03-22 목양칼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Spring is not like spring)은 계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꽃이 피고 날이 따뜻해도 마음이 괴로우면 봄이 봄일 수 없습니다.

2014년의 4월이 그랬습니다. 봄이 오고 벚꽃이 흐드러졌지만, 우리는 세월호가 가라앉은 차디찬 바다에 빠져 모두 함께 허우적거렸습니다. 통곡하는 부모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꽃이 예쁘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봄도 뭔가 좀 이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봄을 즐기러 공원에 꽃구경을 나오는데,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19가 두려워 방안을 서성거립니다.

유럽에서는 엄청난 환자들과 사망자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미국도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국가적 총력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괜찮답니다. 오히려 올림픽을 열어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고 바이러스에게 승리하자고 외칩니다. 무수한 노인들을 가진 나라, 그래서 어쩌면 세계에서 제일 바이러스에게 취약한 나라가 일본일텐데, 일본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봄을 맞은 사람들과 봄을 맞을 수 없는 사람들의 혼탕과 같은 현실도 이상하지만, 이렇게 이상한 현실에서조차 아무도 시끄럽지 않은 것이 더욱 이상합니다.

그리고 정말 두려운 것은, 그 사회적 침묵 속에서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벚꽃이 떨어지듯, 사람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생각하니 저는 요즘 밤잠이 오지 않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나라를, 일본을 불쌍히 여겨 주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같이 마음을 다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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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치를 심하게 앓았다. 나중에는 가는 치과마다 어금니를 뽑을 것을 권했다. 
임플란트가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였다.
계속되는 치통 속에서도 나의 이빨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하루에 진통제를 여섯 번을 먹었던 날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빨을 포기하지 못했다.
아프니 별짓을 다했다. 프로폴리스가 좋다고 해서 잇몸에 뿌리고, 구강청결제로 가글을 하고, 치간칫솔을 사용하고, 워터픽이라는 구강세정기도 구입했다. MSM(식이유황)으로 잇몸 마사지를 하면 치통이 줄고 염증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것도 했다. 
그러다가 '오랄 바이오틱스'라는 구강 유산균을 발견했다. 잇몸의 염증과 풍치는 입안의 유산균 균형이 무너져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산균이 해답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놀랍게도, 이 유산균 알약을 입술과 잇몸 사이에 물고 잠을 자니, 다음날에 치통이 현저하게 사라졌다. 잇몸이 내려앉는 퇴축현상이 멈추었다. 심지어 입에서 심해지던 구취도 점점 사라지는 효과가 있었다.
요즘은 지속적으로 이 유산균을 쓰고 있다. 가끔 잇몸에 피가 비치거나, 치통이 약하게 오면 바로 입에 한 알 물고 잠자리에 든다. 물론 이빨을 예전보다 깨끗하게 신경 써 관리하는 것은 기본이다. 
많이 아퍼 보니, 비로소 아프지 않은 이의 소중함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이 해답이 모든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병증은 다양하고, 약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서 약을 함부로 권하는 것은 삼가할 일이다. 
다만, 이 약이 내게 온 과정이 좀 특이하다. 사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너무너무 이가 아프던 어느 날, 나는 거울을 보고 그런 기도를 시작했다. 욱신거리는 턱을 부여잡고, 불쌍한 눈빛으로 나는 혼자말처럼 기도했다.
"하나님, 내 이빨 지켜 주세요. 뽑지 않게 해주세요. 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의사 중의 의사시라고 믿습니다. 나 좀 고쳐 주세요."
그 기도는 제법 간절했다. 그리고 그 기도가 거울에 비추었을 때, 나는 내 자신의 기도에 설득되었다. 이것은 기도할 일이라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아무도 내게 '오랄 바이오틱스'를 권하지 않았다. 입에 쓰는 유산균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전에는 전혀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느 밤에 우연히 '아이허브'에서 그것이 내 눈에 보였다. 제법 비싼 가격에도 나는 그것을 구입했고, 이후로는 계속 사용하고 있다.
나는 내 기도의 응답이 이런 식으로 내게 임했다고 생각한다. 
간절한 기도와 그에 이어지는 행동 사이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비법은 단순히 치통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내게 은혜가 되었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로 나의 마음을 채우게 했다.

하나님의 응답은 허공의 소리가 아니다. 그 어떤 신비로만 아찔하게 임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현실에 늘 함께 하신다. 나는 그분을 느끼며,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으로 인하여 은혜를 입는다. 그분은 나를 수도 없이 고쳐 주셨고, 나뿐 아니라 내가 위하여 기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너무도 또렷하게 보인다. 그분의 손길이, 그분의 일하심이, 그분의 능력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셨고, 내 이빨을 지켜 주셨다. 물론 영원한 것은 아니다. 나이를 더 먹고, 노쇠하면 언젠가는 내 이빨이 부셔지고 나를 떠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더 이상 이빨이 하나도 남지 않은 날에도, 내게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실 것이고 그분으로 인하여 나는 감사와 찬양을 드릴 것이다.
사실, 기도의 응답은 별게 아니다.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구원을 받겠는가? 소원이 이루어지면, 또 다른 소원이 생길 뿐이다. 결국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그분의 함께 하심이다. 임마누엘이다. 그래서 나는 풍치에서 해방된 사실보다, 나를 고치신 하나님의 임재가 더 중요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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