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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0


퇴임을 앞둔 고이즈미 일본총리가 8.15 종전 기념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습니다. 우려했던 바와 같이 한국과 중국은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당분간 외교적으로 관계가 경색되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입니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일본의 교육제도는 ‘국사(일본사)’가 선택과목으로 되어 있어서 많은 학생들이 오히려 세계사를 공부하고 국사를 공부하지 않아서 자기들의 역사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현재의 상황만을 가지고 이해하니, 한국과 중국, 대만 등의 반응이 ‘내정간섭’과 같은 기쁜 나쁜 시비로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주변국들이 더 강력하게 항의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것이 일본의 내부적으로는 극우파들의 주장에 힘을 더 실어주는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 되었든 지금 일본 땅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입니다. 과거를 빌미로 일본을 정죄하는 것보다는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모색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보다 더 명백한 입장을 취하고 토론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역사에 대하여 깊이 있는 이해를 가져야 하고, 일본인들이 알지 못하는 일본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그야말로 개미처럼 일하는 근대를 살아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 속에서 유별난 근면함으로 경제를 일으켰고 오늘날의 부국을 이룬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는 나라와 회사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고 자기를 희생한 순진한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본이 나쁘다’는 주변의 목소리는 그들에게 있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때문에 일본의 우익화는 교묘하게 조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실상 철저하게 자기를 억누르며 나라와 집단을 위하여 헌신해온 사람들의 마지막 선택-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기가 헌신했던 ‘그것’을 지키려는-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인과 일본인의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바탕 위에서 진심으로 그들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비전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의 대통령이나 외교부 장관의 말보다 바로 여러분이 이 일본의 사회 속에서 지혜롭게 던지는 한 마디가 오히려 일본을 움직이고 일깨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먼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원수였던 일본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인 우리의 사명입니다.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말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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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3


지난 2일 일본의 마이니치신문은 흥미로운 조사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각 나라의 자녀들이 부모와 보내는 시간을 조사한 것이었는데, 특별히 아빠와 자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하루에 얼마나 되는가가 초점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가장 시간이 적은 나라는 한국으로 2.8시간, 그리고 그 다음이 일본으로 3.1시간이었고, 미국과 스웨덴 등은 4.6시간, 태국은 5.9시간을 자녀들이 아빠와 보내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자녀들이 아빠를 빼앗긴 이유는 장시간에 걸친 노동, 즉 일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주간에 무려 60시간 이상을 일에 할애하는 아빠들이 보편적인 현실에서 아이들은 아빠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제대로 가지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기사를 대하면서,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살아가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과 일본, 양편이 다 좋은 역할모델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라면, 점점 더 자녀와 아빠의 건강한 관계형성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가 앞섭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아바’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유년 시절에 아버지와 건강하고 친근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 건강한 신앙의 형성을 위해서도 얼마나 소중한 자산이 되는가를 말해 줍니다. 아빠를 잃어버린 이 시대는, 어쩌면 그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하나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자녀들을 위한 윤택하고 좋은 조건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영양가 있는 식생활, 최상의 교육, 정서적인 안정, 친구 등... 한 사람을 건강하게 양육하기 위한 요인들은 다양하고 긴밀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우선하여 하나님은 ‘가정’이라는 소중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때문에 가정이 바로 서면, 다른 조건들이 아무리 부실하더라도 자녀는 올곧게 양육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조건들이 아무리 충분하더라도 가정이 흔들리면 자녀는 불안과 방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현대를 살아가며, 때때로 어쩔 수 없는 분주함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1달, 6개월, 1년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돌아가야 합니다. 아니, 되도록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엄마는 엄마의 자리로, 아빠는 아빠의 자리로 돌아가서 아이들과 인격과 신앙의 유대를 깊이 해야 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녀는 그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다른 것을 얻어도 내 아이가 건강한 신앙과 인격으로 자라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 자라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내야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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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6


光が丘公園(히까리가오까코엔)에서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まつり(마츠리, 지역축제)를 합니다. 궁금한 마음에 아이들과 아내가 구경을 나갔는데, 꼬치와 뽑기 등의 노점상만 있고 한국의 장터와 별로 다를 바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더위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서 오후까지 공부를 하던 아이들이 바람을 좀 쏘이고 오겠다고 해서 허락을 했습니다. 한 시간 즈음 집을 나갔던 아이들이 돌아왔을 때, 큰 아이는 힘이 나 있었고 작은 아이는 맥이 빠져 있었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둘이 나가서 500엔씩 내어 뽑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큰 아이가 먼저 했는데, 제법 그럴듯한 권총과 다트를 뽑아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자 작은 녀석이 자기도 그렇게 뽑기가 나올 줄로 알고 했다가 그만 꽝이 나와서 카드 몇 장만 받아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구두쇠 짓을 해서 모았던 용돈을 어이없이 날렸다는 생각에 작은 녀석이 눈물까지 핑 돌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뽑기를 했다는 사실을 나무라지도 못하고 우선은 오히려 위로를 해야 했습니다.

제가 나중에 두 아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그 아줌마는 장사를 하는 거란다. 세상에 이익이 남지 않는 장사를 누가 하겠니? 더구나 이 더운 날에 말이다. 물론 준혁이만 생각하면 아줌마가 손해를 보는 것이 되겠지만, 준혁이를 보고 찬혁이가 뽑기를 해서 꽝을 뽑았으니 결국 아줌마가 이익을 남겼구나. 애초부터 돈은 적게 내고 물건은 좋은 것을 가지려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찬혁이가 낭패를 본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니지만, 다음에 또 같은 일을 한다면 준혁이도 낭패를 볼 것이고...”

아이들을 타이르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최소의 노력으로 최고의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자본주의 논리는 우리의 내면 깊숙이 뿌리내려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뽑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의 길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로또를 매주 사기도 하고, 공부는 별로 안 하고 성적이 잘 나오기를 기대하기도 하며, 심지어 뿌린 것도 없이 거두려는 방식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평하신 하나님 앞에서 결국 모든 인생은 자기가 심고 뿌린 것을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공짜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땀 흘린 만큼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이고, 이 원리대로 살 때에 사람은 심신이 건강하게 됩니다. 불로소득(不勞所得)을 경계하십시오. 당장에는 입에 달지만, 실상 그것은 우리의 영성을 망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득은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깨끗한 것이어야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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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30


장마가 끝났다고 합니다. 이번 장마 동안에 한국에서는 기록을 갱신하는 큰 비로 인하여 곳곳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더러는 소중한 인명이 상하기도 하였고, 막대한 재산의 피해를 입은 곳도 많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런 어려움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더욱 힘겨운 것 같습니다.

특히 전북 장수군에서는 한 어머니가 기막힌 일을 당했습니다. 20년 전에 일곱 살짜리였던 큰 아들을 잃었던 하천에서, 이번에는 정신지체3급의 막내아들(이상길, 24세)을 또 잃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울 힘도 잃었고, 3형제 중 유일하게 남겨진 둘째는 그저 무심한 하늘만 바라보며 한탄을 했습니다. 

목회자로 제일 난감할 때가 바로 이와 같은 일들에 대하여 질문을 받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이 생기도록 허락하시는가? ……

사람들은 이런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기도 하지만, 또한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인생의 부조리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해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욥기를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욥이 사탄의 시험으로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의 이유를 궁리하게 됩니다. 이 때 나타난 욥의 세 친구는 욥의 시련이 분명히 그의 잘못으로부터 왔을 것이라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러나 경건에 최선을 다했던 욥은 이런 조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욥과 세 친구의 긴 논쟁이 끝나갈 무렵 그들 앞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욥이 당한 시련을 빌미로 욥을 책망하려고 했던 세 친구에게 오히려 하나님이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고난의 이유를 찾았던 욥에게는 오히려 이렇게 질문하심으로 욥의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욥 38:1~4)

38:1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38:2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8: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기를 보면, 하나님은 끝까지 욥의 고난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그에게 설명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쉽게 알지만, 아마도 욥은 천국에 가서야 자기 고난의 이유를 알았을 것입니다. 

인생은 모르는 중에 살아갑니다. 땅의 기초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그 땅 위를 밟고 사는 존재입니다. 자기 시련의 이유도 알지 못하면서 더구나 남의 시련에 대하여 함부로 해석하고 판단해서야 되겠습니까?

겸손히 자기를 살피고 지혜를 구할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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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23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신령한 체험과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 몸을 내어주는 헌신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nothing)’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또한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진정한 사랑이 없는 신자는 결코 빛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1장의 말씀을 참고로 할 때, 이 빛은 바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안에 있는 신자가 사랑의 정서 없이 존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우리가 가장 많이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또한 가장 많이 회개해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업적과 공로를 중시하고 정의를 강조하는 환경 가운데 살아갑니다. 정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이것이 침해될 때에 우리는 친구에서 적이 되며, 함께 손잡기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세상의 원칙을 초월하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몸소 사랑의 실천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의지에 의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는 예수님의 방식으로 예수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이 공동체의 가장 강력한 특징은 ‘사랑’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곤 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온갖 일은 행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랑에는 대단히 고갈된 모습일 때가 많습니다. 결국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은 교회가 실현해야 하는 주님의 꿈을 퇴색하게 합니다. 거대한 군중과 화려한 건물이 만들어지고 하나의 단체가 오랜 세월동안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 무엇일 뿐입니다.

저는 말라기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탄식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적질한 십일조와 제물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이웃을 향한 신자의 사랑이 고갈되었음을 드러내는 상징인 것입니다. 때문에 말라기서는 하나님이 양과 소의 피에 굶주려 탄식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의 사랑 없음에 대하여 탄식하신 것입니다.

연보(헌금)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신자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때문에 오늘날 연보만으로 자기의 헌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서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은 대단히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게 과연 그리스도의 사랑이 역사하는지에 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하고, 그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회개하며 은혜를 갈망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신자는 신자다워질 수 있습니다. 사랑 없는 신자는 그야말로 ‘앙꼬 없는 찐빵’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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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16


여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이 발발하여 다시 세계는 피 냄새를 맡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는 가난과 에이즈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고 중동은 끓어오르는 반미정서로 인하여 언제 불이 붙을지 조마조마한 상황입니다. 반 토막의 조국은 북한에서 발사하는 장거리 미사일과 그것을 막으려는 주변국들의 갈등으로 시끄럽고, 일본은 이와 같은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여 소위 ‘보통국가’로 갈려는 우익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장 나 살기도 바쁜데 이 모든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행복은 세계의 틀 속에서 가꾸어지고 있고 때문에 판 자체가 깨어진다면 누구도 자신과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딤전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제사장입니다. 이 사명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화목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바로 제사장의 사명입니다. 나의 기도와 헌신으로 세상은 하나님의 빛을 보아야 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용서하실 명분을 얻으셔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사람이 없어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의인 10명만 있어도 하나님이 한 도성을 용서하시는 명분이 세워질 수 있음을 이해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아브라함 자신과 자기 가문의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신앙으로 세우려는 욕심이 있었고, 그러한 욕심은 결국 ‘제사장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로서 현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일은 그 어떤 것이라도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른 정치가 세워지고, 전쟁이 종식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지가 주어지고, 바르게 인권이 확장되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입니다. 그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헌신할 때에, 세상은 하나님의 향기를 맡게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세상을 용서하실 명분을 찾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조국과 세계를 위한 참된 중보의 기도가 상실된 신자들과 자기의 삶에만 몰입할 뿐 이웃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 신자들을 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성경의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 삶은 결국 신자 자신의 삶에서 풍성함을 앗아갈 뿐 아니라 그 신자를 통하여 세상에 부어질 하나님의 풍성함도 헛되게 합니다. 제사장으로서 크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넘치도록 채우실 것입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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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9


응답에는 고비가 있습니다. 저는 실망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받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언제나 마지막 고비가 있었습니다.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은 더 나빠지고, 환경은 더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안의 자아는 흔들리고 요동쳤습니다. 때론 자포자기(自暴自棄)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막 나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륜이 쌓이고 응답의 비밀을 배워가면서, 저는 이 모든 어둠의 과정이 오히려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둠을 견디면서도 더욱 하나님을 의뢰하고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은 바로 그런 눈물 속에서 향기롭게 핍니다.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전 4:8~9)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기까지 아직 끝은 아닙니다. 속단하지 마십시오. 성급한 판단은 언제나 응답의 장애를 초래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그저 내가 바라는 바를 계속하여 아뢰기만 하십시오. 내 예상을 버리십시오. 그 예상으로부터 실망이 자라나서는 믿음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그저 모든 것을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내가 바라는 대로 되어가지 않아도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탁월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응답을 기다리는 과정은 피가 마르는 시간입니다. 특히나 결정적이고 중요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 기다림의 과정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더 근신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기를 잉태한 여자가 몸가짐을 조심하는 것처럼, 기도를 잉태하고 응답을 낳기 위해서는 신중한 말씨, 행동, 생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상을 달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에서 믿음이 모자라 응답이 연기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실망하지 말고 더욱 주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가져야만 합니다. 때로 그것은 연극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되고자 하는 바로 그 모습을 연습하십시오.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중간에 맥 빠지고 포기하려 한다면 오히려 기도를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향하여 서십시오. 절대로 중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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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2


기독교 출판계의 모든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저작한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입니다. 유명세를 겪는 통에 기독교 계통에서뿐 아니라 일반 언론에서도 릭 워렌 목사에게 자주 인터뷰를 요청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가장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보는 질문은 과연 이 초대형 목사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가에 대한 것이랍니다. 교회에서는 얼마나 사례비를 받고, 책의 인세는 얼마나 들어오는 것일까?

릭 워렌 목사는 책을 통해 엄청난 인세가 들어오게 되자 이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는 먼저 지난 25년 동안 교회에서 받았던 모든 사례비를 반납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아내와 의논하여 과거의 삶의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였습니다. 개조한 트럭을 그대로 타고, 과거에 살던 집에서 이사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입에서 90%를 에이즈와 빈곤 퇴치를 위한 재단 설립에 사용하고 자신들은 1/10을 가지고 생활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결정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목사가 돈을 위해 책을 쓰고 사역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로서의 대단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자 요한 웨슬리는 자신의 경건 생활을 위하여 특별한 십일조의 법칙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는 10달러를 벌면 1달러를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수입이 15달러가 되어도 역시 자신을 위하여 9달러만 사용하고 6달러를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심지어 그의 수입이 100달러가 되어도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9달러의 삶을 유지하고 91달러의 십일조를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의 삶의 초점이 물질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을 진심으로 고백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수한 신앙의 고백과 구호들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 허무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작은 것도 제대로 헌신하지 못하면서 말만 번지르하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말과 함께 감동을 자아내는 행동이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릭 워렌 목사도, 웨슬리도 진정 바울이 배웠던 바로 그 일체의 비결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가난할 때도 주님의 사람이었지만, 부유할 때도 역시 주님의 사람으로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주님을 향한 목적에서 추호도 벗어남이 없다는 것을 말이 아니라 바로 생활로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크리스찬이 되어 주님을 영화롭게 합시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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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5


한국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월드컵에서 모든 아시아팀이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기적과 같은 승리를 기대했던 일본이나, 투지를 불태웠던 한국의 탈락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한국팀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심판의 불확실한 판정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높았습니다. 참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경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2년의 4강 진출이라는 한국의 위업이 결코 주최국의 기득권에 의해서만 달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이번 월드컵 리그의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팀을 약체로 평가하는 논조가 대체적으로 사라졌고, 이제는 유럽과 의연하게 겨룰 수 있는 팀으로, 그 체력과 조직력에서, 정신력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 매우 소중한 소득이 아닐까 합니다.

최근에 읽었던 차범근 해설위원의 칼럼이 생각납니다. 차감독이 독일의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여 뛰던 시절에는 매 경기마다 전투와 같은 각오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라운드의 모든 선수들이 경쟁자였고, 그래서 목숨을 거는 축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차두리는 똑같이 세계 무대에서 뛰지만 자기와 많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선수이면서도 지단과 같은 축구영웅의 팬이고, 경기에 나가지 못해도 상처받기 보다는 의연하고 즐겁게 축구를 하는 것이 부럽다고 했습니다. 차범근씨의 축구가 투쟁이었다면, 차두리의 축구는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독일까지 대규모 응원단을 보내어 다수의 프랑스 응원단을 잠재우고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조국의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응원을 마치고 뒷자리를 치우는 모습이나, 선수단을 향하여 못하는 것을 꼬집어 욕하기 보다는 격려하고 다음 월드컵을 위해 준비하자고 다독거리는 어른스러운 모습이 기쁘기도 합니다.

축구라는 하나의 종목에 세계가 열광하는 월드컵 리그에서 우리는 세계와 어깨를 대등하게 하고 비로소 자기의 몫을 감당하는 현재의 우리를 다시 발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번 한국팀의 보배로 일컬어지는 박지성 선수는 스위스와의 게임이 끝나고 나오면서도 심판을 비난하기 보다는 “그래도 심판의 판정도 경기의 일부이다. 내가 아직 만족스럽게 플레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습니다.  참 건강한 젊은이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히딩크가 보여주었던 좋은 리더십도 필요하고, 박지성, 이영표와 같은 신세대의 새 능력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았으니 그것을 찾고 보충하면 반드시 더 좋은 성적을 거두고 더 뛰어난 민족성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조국을 위해 더 기도하도록 합시다. 

다음 월드컵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것은 저만의 성급함일까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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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8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고난을 통해 자기를 연단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누일 뿐이다. 미국 유수의 명문대학들에 한국인 2세들의 입학률이 타 민족에 비하여 월등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 졸업까지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이 적단다. 우등을 하는 동안에는 뛰어나던 아이들이 추월을 당하면 낙담을 하고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기는 법만을 알았지 제대로 지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는 이기는 법을 아는 것만큼이나 제대로 지는 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고난은 이런 능력을 키워주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나는 승리하는 법만을 아는 성도들이 불안하다.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큰 낙담을 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만만하지 않다. 누구나 언젠가는 한 번쯤 위기에 직면하는 것이 인생이다. 잔병으로 자주 병원에 가는 사람보다 평소에 감기도 잘 걸리지 않던 사람이 큰 병으로 생사의 위기를 넘나드는 것과 같다. 인생의 성공 비결은 재능이 아니라 ‘강인한 마음’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셔서 다가갔습니다.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더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 [ 로버트 슐러 ]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자신 안에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어 승부할 때인 것이다. 

젊은 날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연습일 뿐이다. 어린 아이가 두 발로 서서 걷기 까지 보편적으로 3천 번이 넘게 넘어진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는 그 3천 번의 넘어짐을 통과하여 두 발로 서서 걷는 법을 배웠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서너 번 더 넘어진다고 해서 무엇이 부끄러울 것인가!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절망하지 않는다면 기회는 반드시 있다. 마음이 무너지려 할 때에는 기도를 하라. 주님께서 약속하신 새 힘을 구하라.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게 해달라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성공을 위한 인생을 살지 말고 인생을 위해 성공하라. 성공과 실패가 모두 인생의 부분이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성공적인 인생을 이룬다는 사실을 생각하라. 지금의 고난은 언젠가 추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되도록 멋있게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이다음에 손자들에게 해줄 이야기 꺼리라도 되지 않겠는가?  마음으로 대장부가 되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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