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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17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2. 2015.01.17 교회는 가족입니다
  3. 2015.01.17 새해를 시작하며
  4. 2015.01.17 당신의 예배는 온전합니까?
  5. 2015.01.15 친구
  6. 2015.01.01 201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7. 2014.12.06 아침의 언어를 훈련하십시오.
  8. 2014.12.05 만년필(萬年筆) 1
  9. 2014.12.04 삼한사온(三寒四溫)
  10. 2014.10.28 길은 여기에




2015-01-18 목양칼럼 ::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누군가는 나라를 지키고 있고, 누군가는 병원을 열고 있으며, 누군가는 거리를 쓸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의 수고를 통해 당신이 살아가는 삶의 안락함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의 눈물과 땀에서 당신과 당신 가족의 웃음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누군가는 당신의 축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당신의 가족을 전도하고 있고, 누군가는 당신의 교회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의 눈물과 땀에서 당신의 신앙은 자라나고 꽃 피는 것입니다.

겸손 하십시오. 우리가 누리는 것들의 대부분은, 다른 분들의 수고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감사하고, 그런 분들을 주변에서 뵐 때마다 귀하게 여기십시오. 

사람을 향한 감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도 허울뿐인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신앙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되도록 멀리 빛을 비추어서 당신의 빛을 보고 세상의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시오.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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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1 목양칼럼 :: 교회는 가족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맏형이 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특별한 가족이라고 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오는 곳도 아니고,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 오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삶을 함께 향유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모이는 곳입니다. 만약 우리가 교회의 이 특별한 특성을 회복하고 지키지 못한다면, 교회는 탐욕과 향락의 세상에서 점점 쇠약해갈 것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이 사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세상의 관계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도 가정을 잃으면 불행에 빠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교회는 근간이며 우선적인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지키지 못하면, 부유한 수익과 안락한 삶이 초라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교회를 소중히 하십시오. 특별히 교회를 하나의 거룩한 가족으로 삼기 위하여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각기 다른 삶으로 만났으나, 이후로는 주님의 나라까지 좋은 동행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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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4 목양칼럼 :: 새해를 시작하며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지나갔습니다. 지나간 것은 마음에서도 떠나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 중의 하나가 망각의 은혜입니다. 시간이라는 물결에 실어 모든 어렵고 힘든 것을 흘려 보낼 수 있기에 우리는 건강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묶여 불행해지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새해의 새 마음은 단지 미래에 대하여 기대하는 마음만은 아닙니다. 미래의 소망을 잘 가꾸기 위해서는 먼저 묵은 것을 잘 정리해야 합니다. 보낼 것을 보내고, 잊을 것을 잊어야 합니다.

좋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끌어와 현재의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필요하듯이 그 사람도 역시 새로운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랑으로 잊어 주십시오. 적어도 더 이상 입 밖으로 과거의 허물을 끌어내 공격하지 마십시오.

새 포도주는 새 그릇에 담으라고 하셨던 말씀처럼, 새해는 새 마음에 담아야만 합니다. 나의 마음도 새 마음이어야 하고, 그의 마음도 새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 서로 지켜주는 사람이 됩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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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7 목양칼럼 :: 당신의 예배는 온전합니까?


믿음은 섬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완전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다리(bridge)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하여 소홀하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 소홀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반드시 정성스러운 마음과 태도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과 예배를 드리는 태도, 그리고 예배를 드린 이후의 모습을 보면, 과연 이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사모하는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준비 없는 예배, 시간에 늦어 허둥지둥 나오는 예배는 우리가 믿음을 얼마나 소홀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말해줍니다. 또한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졸거나 다른 생각에 시달리는 것은 영적인 삶과 자기 내면의 변화에 대한 갈망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목마름이 없으니, 아무리 깊고 맑은 생수가 눈앞에 솟아나도 그에게는 지루한 설교(=잔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자마자 곧바로 근심과 염려의 자리로 돌아가거나 불평을 해대는 것은, 그의 영혼이 아직도 세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결국 방금 드려진 예배는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의 입은 다른 지체들의 받은 은혜까지 훼손합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왜 신중하지 않습니까? 왜 자신의 습관을 고치려 노력하지 않습니까? 왜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변명합니까? 사람도 불쾌하게 생각하는 행동을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행하려 합니까?


믿음은 섬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섬세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시니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무거운 부담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 출발점은 예배가 되어 마땅합니다. 예배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 삶의 실천과 영적인 내면의 경건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농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예배는 온전하게 드려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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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목회/목양칼럼 / 2015. 1. 15. 01:00





나이을 먹어갈수록 절실한 존재가 바로 '친구'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만 곁에 계시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전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에,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된 세상에서 처음으로 '좋지 못하다'는 평가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원죄의 이전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독처'(to be alone)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옛부터 남성들은, 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는 원죄의 사건이 바로 여자(하와)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자기 결정과 행동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비겁함의 수법입니다.

더구나 이 문제는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아담이 혼자였다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창세기의 '좋지 못하다'는 선언은, 아직 죄는 아니지만 근원적인 악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돕는 배필'의 출현으로 사람의 타락이 촉진된 것이 아니라 지연된 것이 아닐까요...


오늘을 바탕으로 생각해 봅시다. 

대부분의 범죄는 혼자일 때 일어납니다. 또한 서로의 관계가 깨지고 변질되는 것도 그 주요한 원인입니다.

전도서도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뒷받침하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4: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아담과 하와도 떨어져 있다가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결국 독처하는 것이 나빴던 것입니다.


신앙인은 경건을 추구하고 내면을 돌보기 위하여 고독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경건한 고독'이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그러나 신앙인이 상시적으로 고독 속에 살아가는 것은, 적어도 성경적 관점에서는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은 그릇으로 덮어두면 꺼집니다. 소금은 맛을 더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주인공은 아닙니다.

관계를 맺고 깊어지게 하는 것을 교제라 합니다. 

심지어 교회의 이름으로 '교제(코이노니아)'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진실한 경건은 친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진실한 친구는 반드시 허락될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지혜롭고 선량해도 개인의 의로움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과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더욱 귀하고 소중한 친구일 것입니다.

속담처럼,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 될수록 값진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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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로운 달력이 시작되려나 봅니다. 그러나 새해(New Year)는 달력이 바뀐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사람의 마음이 달라져야 비로소 이전과 다른 새로운 시간이 열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호10:12)

건조한 팔레스타인의 기후에서 땅의 표피는 마르고 단단해졌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씨를 뿌려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뜨거운 햇살에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소와 쟁기를 이용하여 땅을 기경합니다.

땅을 깊이 갈아 엎으면, 굳었던 땅에서도 부드럽고 기름진 속살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에 씨를 뿌려야 비로소 풍성한 결실을 기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굳어지고 메마른 것은 새로운 생명을 품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이치가 이러한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 굳고 딱딱하면 미래에 무슨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새해의 첫 달력을 시작하면서, 먼저 우리들의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의 마음에는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준비가 되었는지... 

과연 우리의 마음에는 묵은 것을 갈아 엎고 새로운 생명을 품을 준비가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다시 주신 한 해의 기회 속에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며, 또한 우리 자신을 행복하고 보람 있게 할 수 있는 것에 올바르게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모든 분들에게 더욱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해 동안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샬롬~


2015년 1월 1일,

동경드림교회 김종선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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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6 목양칼럼 :: 아침의 언어를 훈련하십시오


하루를 감사하는 언어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습관입니다.

그것은 새벽기도 만큼이나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합니다.

잠에서 막 깨어난 상태에서 우리는 정신과 몸의 공허를 경험합니다.

물론 육신의 통증이나 어제 근심의 여운이 우리를 한숨과 불평으로 인도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아침이 가장 약한 시간일 것이고, 때문에 아침에 이것들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루 종일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침의 첫 언어가 언제나 감사와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사람을 향한 언어가 아니라, 마땅히 우리 인생의 모든 첫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향한 언어입니다.

이러한 입술의 경건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은 많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묵상하게 될 것이고, 우리 영혼이 온 몸과 정신을 주관할 수 있도록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덧없는 불평과 부정적인 언어로부터 하루를 구원하는 예방주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의 언어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것은 결코 과장된 주장이 아닙니다. 

아침의 언어를 바꾸어 보십시오. 그것을 되도록 은혜스럽게 훈련하십시오. 상황이 지배하는 인생이 아니라 의지와 신앙이 지배하는 인생이 되도록 노력해 가십시오.

오늘 하루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아침이 보석과 같이 빛나기를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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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5 목양칼럼 :: 만년필(萬年筆)


저에게는 20년쯤 묵은 만년필이 하나 있습니다.

Parker Sonnet France라는 모델인데, 아주 고가품은 아닙니다. 그래도 금도금의 닙(nib,펜촉)에 고전스러운 스타일로 대략 10만원이 넘는 제품입니다. 제가 구입한 것은 아니고 사실은 저의 외조부님께 받았습니다. 

이것으로 보통 초고를 씁니다. 요즘은 어깨 통증이 생겨서 자판 사용을 되도록 삼가다 보니, 이 녀석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친구 같은 펜입니다.


만년필을 사용한다는 것은 손에 잉크를 묻히는 일입니다. 그것은 거의 피할 수 없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대상처럼 순순히 반응하다가도, 갑자기 토라져서 잉크를 내놓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한참 글을 쓰다가도 펜촉을 붙들고 씨름을 해야 합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오래 방치한 죄가 있습니다. 매일 써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만년필의 특징입니다. 관리를 잘해주고 좋은 잉크를 사용하면 덜하지만, 혹여 질 나쁜 잉크를 먹이거나 관리를 소홀히 하면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심통을 부립니다.

어떻게 관리를 하냐고요? 대략 한 달에 한 번은 미지근한 물로 만년필의 모든 묵은 잉크를 씻어내야 합니다. 익숙하면 간단하지만, 그래도 꽤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무지 번거로운 필기구를 비싼 돈 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편리를 신봉하는 세상에서 잉크를 계속 넣어줘야 하고, 찌꺼기를 청소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이 녀석을 왜 사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녀석의 매력이 있습니다. 서걱거리는 필기감이 주는 손맛은 물론이고, 그렇게 까탈을 부리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를 못합니다. 펜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 글에 정성이 베이는 것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펜이 그려내는 자신의 글씨를 보면서, 성급함을 자제하고 생각의 꼬리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쉽고 깔끔한 것만이 미덕(美德)은 아닐 것입니다. 조금 불편하고 덜 깔끔해도 그 위에 스며드는 한숨과 땀이, 눈물이 더 인간적인 무엇을 탄생하게 만듭니다. 그 미완의 불편함이 좋아서 저는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오래 사용하는 과정을 통해 이놈이 나를 닮고, 내가 또 이놈을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감정적인 글을 토해내려고 할 때 이 녀석이 브레이크를 걸기도 하고, 좋은 글을 쓸 때에는 술술거리며 저를 격려하기도 합니다.


만년필을 사용한다는 것은 펜과 사람 모두에게 성장하고 길들여지는 과정 같습니다. 

펜이 사람에게 그러하듯, 사람 또한 펜에게 그러합니다. 

만년필은 번거롭고, 고통스러우며, 고단하고, 냉철합니다. 그래서 펜은 마음을 강하게 합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 같습니다. 


아마도 크게 망가지지 않는다면, 이 녀석은 저와 평생을 갈 것 같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녀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생각을 지금까지도 묵묵히 받아 적어 주었던 이 녀석의 수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어린 왕자의 장미가 특별하듯, 저에게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이 펜과의 동행에 이미 담겼으니, 제가 펜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과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펜은 언제나 저에게 대화의 상대이며, 설득의 처음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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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4 목양칼럼 :: 삼한사온(三寒四溫)


추위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겨울 날씨를 흔히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고 합니다. 냉막한 추위도 사흘이면 사그라들고 다시 나흘은 따뜻한 날씨가 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항상 정확하게 지켜지는 규칙은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히 허구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 안에는 자연을 통해 얻어진 인생의 통찰도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에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시간 역시 지나갈 것이며 결국에는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 저는 ‘삼한사온’이라는 말 속에서 긍정과 소망의 태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구상에는 추위만 계속되는 날씨도, 더위만 계속되는 날씨도 물론 있습니다. 극지방이나 적도에서는 실재로 그런 날씨를 각오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인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순환의 주기는 약간 다르다 할지라도 추위와 따뜻함의 반복은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통하여, 창조주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여정 역시 비슷하다고 말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장 추위가 찾아왔다고 너무 두려움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의 옷깃을 여미고 소망의 불씨를 인내의 입김으로 북돋으며 기다리면 됩니다. 반드시 따뜻한 날은 우리 곁에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옛날 이야기를 하듯 지금의 어려움을 오히려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볼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의 손길 속에서 빚어지는 인생의 삼한사온(三寒四溫)을 기억하십시오. 많이 힘들다는 것은 거의 지났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물론, 지금까지 따뜻한 날들을 보내신 분들은 추위도 각오하셔야 합니다. 인생은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모험이니까요… 그것은 전혀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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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목양칼럼 / 2014. 10. 28. 02:39



2014-10-28 목양칼럼


목회생활을 해오면서, 경험으로 깨닫게 된 오의(悟意) 중의 하나는 ‘대단히 신앙적인 모습에 전혀 신앙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신앙을 핍박하는 사람 못지 않게, 교회와 신앙에 대단한 열심을 가진 것처럼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위험합니다. 그들에게도 신앙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신앙은 자신의 신념과 일체화되어 있어서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신앙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십자가의 도를 훼방하는 전형적인 장애가 됩니다.

물론 자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편에 서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늘 자신들을 돌보시고 지켜 주시는 수호신(守護神)이 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사익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사적인 하나님(private-god)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성경은 더 이상 자기부인의 목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성경은 오직 그들의 욕망을 성취하는 길을 찾아내는, 이를테면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던 ‘점 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과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 되어버리면, 이야기는 끝이 난 것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핏대를 올린다고 해도, 그것은 가시나무새의 핏빛 울음이 아니라 혈기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엘리야가 와도, 바울이 와도, 심지어 예수님께서 오셔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듣기 원하는 목소리만 듣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로서 이런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의무는, 그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신성하고 근본적인 목회의 사역이지만, 이 경우의 기도는 전혀 교통하지 못하는 단절의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에게도 부담스러운 숙제가 됩니다. 

그래도 영혼은 귀하고 사람은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무엇은 시기상조(時機尙早)입니다. 오히려 시도할수록 더 깊은 상처의 기억을 남길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렇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는 이런 사람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습니다.

교회의 곳곳에 포진하여, 마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그 외식적 신앙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점령하고 이스라엘을 심판했던 것처럼,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도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보통은 교만한 자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는데, 이 이상한 신앙은 이기적이면서도 연대를 잘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허전한 영혼을 보상하기 위해서일지 모르지만, 매우 든든한 카르텔을 형성합니다. 그 연대의 자기편에서,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런 목사와 그런 성도들이 연대하는 교회는 최악입니다. 이것은 교회라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예배당을 장식하는 장식품일 뿐이며, 전혀 십자가의 도를 들을 수도,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들은 번영을 상징하는 황금 송아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 그들이 부르는 찬양, 그들이 선전하는 은혜는 모두 ‘황금’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적 배교(背敎)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함정이며, 우리가 조심해야 할 원수입니다.

하나님을 설명하고 성경을 해설하는 그들의 어법이 너무 초보적이고 어설픔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의 욕망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내면에서 영적인 진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설교를 통해 그들이 찾는 것은, 어떻게 하면 과연 하나님의 주머니를 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기술’입니다.


예전에, 저는 이들도 교회의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포함되는 사람들이라 여겼습니다. 나와 다르지만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수용하고 함께 손을 잡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사역자로서 내가 갖추어야 할 미덕(美德)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물이 기름과 섞일 수 없는 것처럼, 결국 그런 사람들과 내 신앙이 한 배를 탈 수 없고 멀리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그들의 성경에 대한 난독(難讀)이 이해되지 않았고, 그들은 나의 자기 부정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도구화 해버리는 강력한 자아를 건드리는 메시지는 불편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이 충돌은 양보할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 싸움의 치열함 속에서, 그리고 저열한 사람의 바닥을 보는 경험들을 통해, 결국 이런 사람들이 ‘아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복음 증거의 강력한 훼방자는 분명히 교회 안에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안방을 다 내어준지도 모릅니다. 가는 곳곳에서 경험하고 듣게 되는 이야기가 이런 심증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십시오. 시대가 악합니다. 우리는 변질된 복음과 황금 송아지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 숫자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 안에서 듣고 경험한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장 믿었던 것에서 가장 아픈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쉽게 갈 수도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십자가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에 대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제 그 진리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성경 자체뿐입니다. 묵상이 없는 사람은 망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기 안의 진리를 갈고 닦지 않으면 우는 사자의 먹이가 되는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사방이 어두워 자기 손조차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때에, 우리 앞길을 밝게 비춰주는 등불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그러니 다시 말하거니와, 성경에 생명을 거십시오. 길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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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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