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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5


아이에게서 젖을 떼는 시기가 있습니다. 요즘은 엄마 젖을 대신하여 분유를 먹이는 아이들도 많으니 어떤 아이에게는 젖병을 뗀다고 해야 하겠군요. 아무튼 그간에 익숙했던 생존의 방식을 버리고 낯선 새로운 방식을 습득해야 하는 아이에게는 이 시기가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결사적으로 젖(병)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고, 엄마는 그야말로 독한 마음을 먹으면서까지 아이에게서 젖(병)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대나무가 자람의 과정 속에서 마디를 이루듯, 사람도 성장하면 한 번씩 자기를 점검하고 과거와 선을 그어야 합니다. 그저 익숙하고 편하다고 하여서 기존의 방식대로만 살면, 결국에는 젖(병)을 떼지 못하는 아이처럼 많은 좋은 것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당장은 괴롭기만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다면 그것이 꼭 필요하며 서로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젖(병)을 빼앗는 변화를 통해서만 사람은 바른 성장과 건강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올바른 척도는 내적인 성장입니다. 화려한 이력이나 과거의 경험, 혹은 신비한 능력의 유무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이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얼마나 굴복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변화되었는가가 기독교 신앙의 관건(關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내적인 성장이 편하고 안일한 환경 가운데서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고달프고 바쁜 현장이 곧 내적인 성장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분별력입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에 집중할 것이냐를 제대로 분별할 때에 우리는 신앙을 통해 삶의 질서를 세울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기를 개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를 자랑하고 향수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함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과거의 젖(병)을 버리고 현실로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가 빈약합니다. 하나의 마디를 이루고나면 다시 처음부터, 기초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항상 자신이 ‘졸업생’이라고만 생각하지 정작 이제 새로운 현실 가운데서 ‘신입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완전한 졸업에 이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으로 살다가 주님께 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출발선에 서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며, 또한 익숙한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마음으로 돌아갑시다. 다시 배우도록 합시다. 신앙의 새로운 마디를 이루기 위하여 기초로부터 새로 시작합시다. 익숙한 젖(병)일랑 이제는 이별할 때가 되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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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9


존 비비어는 그의 책 [순종]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가 어릴 때, 폐결핵에 대한 예방주사를 맞기 위해 병원에 갔습니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갔지만, 정작 존은 예방주사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반항을 했는지 간호사 두 명이 달려들어 존을 붙들었으나 결국에는 그에게 주사를 놓을 수 없었답니다.

집에 돌아온 존을 앞에 두고 그의 어머니는 어린 존을 설득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왜 주사를 맞아야 하는지, 주사를 맞지 않으면 어떤 위험에 놓이게 되는지, 존을 고통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기 위하여 주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진지한 설명 속에서 어린 존은 결심을 하게 되었고 비록 주사가 고통스럽겠지만 더 큰 위험을 예방하기 위하여 스스로 주사를 맞겠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존은 스스로 병원에 가서 얌전하게 주사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존 비비어는 때로 예방주사처럼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때마다 이 일화를 떠올린다고 하였습니다. 당장은 쓰리고 아파 보이는 일도 사실은 축복과 보호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돈, 명예, 건강과 같은 것들이 사실은 매우 중간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더 행복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들 때문에 자기를 망치고 남에게 슬픔이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하나님께 구하고도 빨리 받지 못하거나, 혹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의 환경이 열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하며,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인도하심이 우리 인생 가운데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선택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에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대 속에 순종이라는 아름다운 신앙의 미덕이 얼마나 희귀해져 있습니까? 사람들은 자기 맘에 드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야할 아버지는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닙니다.

동경드림교회의 사랑하는 지체들이 좀 더 순종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이 당장은 어려워 보여도 사실, 순종을 결심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내적 평안이 찾아온답니다.

필요하지 않다면 왜 주셨겠습니까? 뭔가 이유가 있겠지요. 당장 이해하지 못해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순종하려고 노력합시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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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2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중고차를 받았습니다. 매우 낡은 차라서 구입한 값보다 이후로 수리비가 더 들어갔지만 지금도 그 차를 잊을 수 없습니다. 

현대 ‘프레스토’라는 차종이었는데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 바람만 나오던 차였습니다. 여름이면 차안이 그야말로 찜통이 되어서 4개의 문을 다 열고 10분은 기다려야 탈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히터 성능은 그만이라서 겨울이면 반팔 셔츠를 입고 운전을 하곤 했습니다. (미련하지요, 히터를 좀 줄이면 될 것을... 그 때는 뭔가 자기 멋에 취했나 봅니다. ^^)

그 차 덕분에 일상에 지치거나 마음이 복잡한 날에는 밤새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동해로 갈 수 있었습니다. 주로 잘 갔던 곳이 주문진인데, 동해에서 해안이 가장 원만하고 조용한 해수욕장입니다. 여름이면 여름대로, 겨울이면 겨울대로 바다를 보며 생각을 하고 자기를 타이르기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는 길에는 설악산이나 오대산에 들려 기암과 계곡과 나무들 속을 하루 종일 걸으며 혼자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미국에서는 아이가 조금 자라면 아빠가 마당의 나무 위에다 오두막을 지어 준다고 합니다. 한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시간과 적당한 고독의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본에서 사는 동안, 외로움은 있지만 오히려 건강한 고독은 부실하다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외로움을 느끼지만, 정작 그 고독이 자기를 잘 정리하고 미래를 다짐하는 건강한 에너지로 승화되지 못하고 그저 우울한 잿빛 하늘처럼 항상 그렇게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엄청난 방세와 미래의 불안은 모두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동경에 왔지만 정작 동경의 실체를 체험도 못하고 그저 집과 학교, 혹은 집과 직장만을 오고가며 수년을 보내는 지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가장 친절하면서도 가장 폐쇄적인 일본 사람들,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도는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외국인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지치고 힘겨운 일입니다.

여름에 계획들 있으십니까? 여러분 하나하나가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합니다. 일상에서 잠시 발을 빼고 혼자일 수 있는 곳을 찾으십시오. 미술관이든, 공원이든, 가까운 지방이라도 좋습니다. 

가며 오며 머리를 좀 비우고, 대신에 새로운 생각과 신앙으로 자기를 채워보도록 하십시오. 늘 하던 생각, 늘 하던 고민의 식상함에서 벗어나 무언가 자기를 가슴 떨리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 보십시오.

쉼은 필요하며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멈추지 않으면 멀리 갈 수 없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지체들이 교회를 통해 더욱 건강하고 행복한 자기를 완성해 가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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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5


1942년 10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을 띠고 출발한 에데리켄 벡커가 바다에 추락했습니다. 그는 ‘날으는 요새’라고 알려진 B-17기를 몰고 남태평양을 횡단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료가 떨어져 비행기가 바다에 곤두박질쳤던 것입니다. 

그는 구명조끼를 입고 탈출했지만 악천후와 물, 상어, 햇빛 등과 싸워야 했습니다. 8일이 지났을 때 휴대용 식량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오후에 혼자서 예배를 드린 다음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졸고 있을 때 뭔가가 그의 모자에 내려앉았습니다. 갈매기였습니다. 그것은 곧 양식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잡아 고기는 먹고 내장은 낚시 미끼로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구조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갈매기는 어떻게 육지에서 수백 킬로나 떨어진 곳에 와 있었을까요? 

하나님만 아실 일입니다. 

구조된 이후 매주 금요일 저녁만 되면 이 늙은 신사는, 양동이에는 새우를, 자신의 가슴에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자신을 구해 준 갈매기들이 떼 지어 있는 방파제로 갑니다.

삶의 과정을 돌아보면, 누구나 한 가지쯤 기적을 만나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위기와 역경의 순간으로부터 우리는 값없는 은혜를 통해 구원을 받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벡커와 같이 그 은혜를 기억하고 평생을 감사에 헌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에는 감격의 찬양을 뜨거운 눈물로 부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감격을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바울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했고, 그 십자가의 구원에 보답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그리스도께 바쳤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고통을 받아야 했지만 한 번도 그것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받은 은혜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죽고, 그리스도인들이 감옥에 갇힐 때에 그가 했던 일들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죄인을 끝까지 찾아와 깨달음을 주셨던 주님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감사가 없고 불평이 스며 있다면, 그것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이 은혜를 망각하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기념하십시오. 삶의 기적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손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는지 항상  찬송하기를 멈추지 않는 동경드림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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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7


사람이 꼭 말을 해야만 마음이 표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직접적인 말보다 더 명확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들이 존재합니다.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간단한 위로, 같이 기도하는 중에 내 귀에 들어온 그의 기도소리, 나에게 준 너무도 적절한 선물, 그리고 섬김들...

참된 사랑이 가슴에 있을 때에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 사랑이 상대방의 가슴에 와 닿도록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 삶에 별처럼 빛나며 우리를 사랑받고 있다는 기쁨과 충만함으로 인도합니다.


아내가 한국으로 떠나며 가스렌지 위에다 포스트잇을 잔뜩 붙여 두었습니다. 된장찌개 끓이는 법, 미소시루 끓이는 법, 김치찌개 끓이는 법, 카레 만들기... 일주일 내내 그것을 볼 때마다 그 쪽지들은 아내의 마음이 우리들 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곤 했습니다.

어제는 지혜네가 자전거로 외출을 했다가 길을 잘못 들어 고생을 했던가 봅니다. 교회에 들어오자마자 박소연 집사님은 다운입니다. 그런데 최동현 집사님은 지혜부터 챙겨 말없이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문득 목사의 눈에 들어온 최동현 집사님의 손길이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최동현 집사님답지 않게(^^) 너무도 섬세한 손길입니다.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흠뻑 느껴지는 손길입니다.

우리는 자상한 손길이나 부드러운 눈빛을 통해 더 자주 사랑의 고백을 받습니다. 어깨 위에 얹은 따뜻한 손의 감촉을 통해 목소리 보다 더 많은 말이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요즘 많이 힘들지요?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오늘 하루 종일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그냥 당신이 그것을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공감(共感)’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표현이 없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양속담에 ‘돈과 사랑은 끝까지 감출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로 사랑한다 하면서 정작 말 보다 진한 마음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불쌍한 사랑입니다.

사랑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열정적인 사랑만큼이나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사랑’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알게 모르게, 항상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묵묵한 그 꾸준함이 그분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한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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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0


안나 로버트슨은 농장에서 고용되어 일을 하던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일하던 농장에서 건실한 젊은이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그의 이름은 탐 모세스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해서 마침내 자기 농장을 마련하였으며 슬하에는 10남매를 두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었습니다.

그녀의 나이가 80세쯤 되었을 때에, 그녀의 손에는 심한 관절염이 찾아왔습니다. 손이 아파 잠을 잘 이루지 못했으며, 점점 감각도 둔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점점 둔감해지는 손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삶의 풍경을 그대로 화폭에 옮겼습니다. 농장, 들판, 사람들과 가축, 노을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어떤 것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뉴욕의 유명한 미술 수집상이 그 마을을 지나가다 한 상점에 들렀습니다. 거기에는 안나의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그는 첫눈에 그 그림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간곡한 요청과 도움으로 안나는 화가로 데뷔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모세스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미국의 역사에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라고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80의 나이에 화가로 데뷔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500여점의 그림을 세상에 남겼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머니가 그렇게 엄청난 작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의 관절염과 외로움이 그 이유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남겨진 외로움과 밤마다 찾아오는 손가락의 통증을 잊기 위하여 그림에 집중하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고통을 없애 달라고요? 좋습니다. 그러나 편안하면 과연 열심과 집중력이 생겨날 수 있을까요? 모든 일이 형통한데도 하나님을 향하여 계속해서 간절하게 매달리는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찾고, 주님의 뜻을 깨닫곤 합니다.

때문에 고통 자체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의 에너지를 승화시킬 위대한 목적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프기만 하고 인생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함이 진정한 고통의 정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모질게 상처받음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더 큰 은혜와 능력으로 그 상처를 덮으셔서 위대하게 하십니다. 고통의 에너지가 은혜로 승화되어서 평범한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소중한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니 삶을 사십시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십시오. 고통에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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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3


큰 아들 준혁이가 드디어 엄마보다 키가 컸습니다. 작년 겨울방학까지만 해도 엄마와 팔씨름을 하면 엄마가 이겼는데, 얼마 전부터는 막상막하(莫上莫下)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전에도 둘이 팔씨름이 붙었습니다.

지는 사람은 서로 1시간 동안 부하가 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엄마는 별로 좋을 것 없는 이 경기를 피하려고 했지만 옆에서 아빠가 부추기는 바람에 어떻게 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결과를 말씀드리면 거의 압도적으로 준혁이가 이겼습니다. 서로 손을 맞잡을 때부터 이제는 준혁이의 손이 더 컸고, 힘을 주는 방법도 남자다와 엄마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준혁이는 기세 등등! 엄마는 뭔가 좋으면서도 섭섭한 표정...

그 때 엄마가 준혁이게 한 마디 했습니다.

“대장님, 그 좋은 힘으로 나가서 설거지나 하시죠?”

비록 한 판의 팔씨름으로 대장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찬혁이와 아빠는 배꼽을 잡았고, 준혁이는 “뭐야, 이게! 대장이 되도 하나도 좋은 거가 없잖아...”하며 같이 웃었습니다.

그러더니 반격을 했습니다.

“나보다 키도 작은 게... 나보다 힘도 없는 게...”

물론 엄마를 깔보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엄마의 표정은 싱글벙글하기만 합니다.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고 말입니다.

준혁이는 아직 모를 것입니다. 자기보다 커지고 힘세진 아들을 보는 부모의 심정을 말입니다. 섭섭한 마음보다 기쁨이 크다는 것을, 그렇게 되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준혁이가 태어났을 때, 아내는 젖이 별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먹성이 좋았던 준혁이는 유난히도 엄마의 젖을 빨았습니다. 부족한 젖을 빨다보니 젖꼭지가 갈라지고 피가 났습니다. 아내는 약도 바르지 못할 정도로 아파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가 젖을 찾으면 그 입에 젖을 물리고 자기는 울었습니다. 그렇게 준혁이가 컸습니다.

그런 준혁이가 이제는 의젓한 청소년이 되어가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에게 지는 것이 왜 기분 나쁜 일이 되겠습니까?

아마도 준혁이가 고등학생 즈음이 되면 팔씨름으로 아빠도 이기지 않을까 합니다. 어쩌면 더 일찍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아빠에게 준혁이는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소중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아무리 아빠보다 커져도 아빠가 안아주고, 돌봐주고, 사랑하고 싶은 ‘아들’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주 안에서 부모를 향하여 최선을 다해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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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06


예전에 제가 가르쳤던 청년이 하루는 같이 주일을 준비하던 중에 이런 푸념을 했습니다. 

“요즘 데이트를 하는데, 아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돈 없으면 사랑도 못하겠어요...”

그 당시에는 ‘좋다’는 의미로 받고 피식 웃으며 넘겼지만, 점점 시대가 그러한 부담감을 웃어넘길 수 없게 만드는 정서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였는데, 이제는 능력으로 비교되고 못해줘서 죄스러운 아버지가 많습니다. 어머니는 그냥 어머니였는데, 요즘은 교양과 졸업장 때문에 자식 앞에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정서는 그리스도인다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세상의 방식과는 다릅니다. 세상은 있어야 줄 수 있고 주어야 사랑이 되지만,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비록 내게 없을지라도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있지 않습니까?

‘나의 힘으론 당신을 사랑할 수 없네. 나의 가진 모든 것으로 당신을 축복할 수 없지만, 주님이 주신 크고도 놀라우신 그 사랑으로 당신을 축복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참된 사랑이란 지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의 자리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동경드림교회가 가족과 같은 교제와 섬김으로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먹을 때만 힘을 합하고 보일 때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허울이며, 가식일 뿐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러한 사랑을 말과 혀의 사랑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말만 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하고, 서로의 입장에서 서로를 생각하며, 주일의 사랑을 일주일의 삶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더욱 깊이 사귀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아직도 우리 교회가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좋은데, 아직 그 사랑을 경건과 거룩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저력이 부족합니다. 인간성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신앙에서 나오는 사랑이 되기에는 아직도 많은 세월의 기도와 목양을 필요로 합니다.

나의 한계 속에서 사랑하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다, 사랑하다 어느 한계를 넘으면 그 사랑이 전부 미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경드림교회 지체들이 보다 큰 사랑에 눈 뜨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며 사랑합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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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2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런던 대공습 기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버지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폭탄 맞은 건물에서 달려 나왔습니다. 

마당 앞에는 며칠 전 투하된 포탄 때문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져 있었습니다. 가능한 빨리 은신처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그 구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손을 들고 딸에게 따라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주위의 폭발에 겁을 먹은 데다 어두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소녀는 “아빠, 아빠가 안 보여!”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늘은 백색 예광탄 불빛으로 환했고 불타는 건물 때문에 사방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고개를 든 아버지는 구덩이 바로 앞에 선 딸의 윤곽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네가 보여. 그러니까 뛰어!” 

꼬마 소녀는 펄쩍 뛰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보여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을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결정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차지 않거나 혹은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의 견해로는 그것이 결코 유익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에라도 우리가 믿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바로 내 영혼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러한 신뢰를 가지도록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11)


맘에 들지 않는 것과 나쁜 것은 다릅니다. 나쁜 것은 우리의 영혼을 시들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수렁에서 건져 주시고, 보다 견고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 주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틀림이 없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진심으로 기도하는 신자라면, 이제는 자기 삶의 주권이 아버지의 손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삶 속에서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의심도, 두려움도 없이 받으십시오. 어둔 구덩이처럼 보일지라도 아버지께서 그곳으로 인도하신다면 주저하지 말고 믿고 가십시오. 확신하건데, 그곳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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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9


세계적인 설교가 제임스 E. 화이트는 그의 책 <하나님과 친절한 사귐>에서 다음과 같은 그의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러시아에서 한 교회의 주일 아침 예배 설교를 부탁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나뿐 아니라 여러 명이었습니다. 예배는 거의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뒤 나는 그 교회 목사님과 잠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배가 긴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교인들의 열의에 더욱 놀랐던 것입니다. 3시간 내내 그들은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지루한 기색도 없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도 집에 돌아갈 마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운을 떼었습니다. “미국에서는요, 예배가 한 시간이 넘으면 여기저기서 시계가 삑삑거립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게 허용되지 않았고, 발각되면 모두 감옥에 들어갔지요. 지금 이런 일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질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저 행복한 겁니다. 그리고 어떤 앞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매주일이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예배를 너무 건성으로, 느긋하게, 습관적으로 드렸던 게 아닌가? 이 사람들은 예배가 무엇인지를 안다. 그렇기 때문에 고초를 당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다시 감내할 의지가 있는 것이다. 예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갈 의지가 있는 것이다. 죽을 의지가 있는 것이다. 한평생 살면서 예배만큼 귀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이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건강을 잃기 전에는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고, 친구를 잃기 전에는 친구의 아쉬움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잃고서야 그것의 귀중한 가치를 안다면 이 또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매주일, 우리에게 소중한 교회가 있다는 것과 아름다운 지체들이 있다는 것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는 간절한 신앙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다른 것들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예배가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예배의 부흥으로부터 영적인 성숙과 전도와 삶의 활력이 생겨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소중하게 지켜져야 하며, 또한 최선을 다해 드려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동경드림교회 지체들에게 권합니다. 예배를 삶의 중심에 두십시오. 그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 소중한 기회를 소홀함으로 잃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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