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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31 



성경의 모든 교훈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것은 방향을 잃은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에 성경이 해주는 최종적인 대답이다. 그러나 질문을 다르게 던지면 대답도 달라진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향하여 ‘우리가 무엇을 꼭 알아야만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성경은 이렇게 대답해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제발 믿어라!”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위하여 쓰였다. 제일 처음 창조되었던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실패와 배신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우리는 이것을 죄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의 사랑보다 죄의 힘이 더 크진 못하다. 

십자가는 그 사랑이 우리의 모든 죄와 싸워 승리했음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안식하는 것에 많은 방해들을 받고 있다. 

첫 번째 방해꾼은 ‘두려움’이다. 우리는 종종 엄한 얼굴로 우리의 죄를 하나씩 들추어 심문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한다. 그분의 눈은 타오르는 불꽃과 같고, 그분의 손에는 예리한 낫이 들려있다. 우리는 두려워 입이 얼어붙는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때문에 죄인도 미워하신다. 하지만 그러한 미움보다 언제나 사랑의 마음이 더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시며, 은혜와 자비가 한이 없으신 분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회개하는 마음을 멸시치 않으신다. 우리는 횟수를 세면서 그분의 용서를 빌지만, 그분은 세지 않고 우리를 용서하신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에 부모는 매를 든다. 그러나 대부분 매를 드는 잘못은 큰 잘못이 아니다. 큰 잘못, 이를테면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잘못을 했을 때에는 미처 부모가 매를 들 기회도 없다. 다만 큰 잘못이 될법한 가능성을 향해 매를 드는 것이다. 아직은 바로잡아 건강하고 바르게 키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향하여 매를 들고 훈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러하시다. 그분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버리시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 하시는 것이다. 

선하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죄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과 에덴동산을 산책하며 즐겁게 대화했던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나무 그늘로 숨어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만약 그 장면에서 아담이 그 두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면 인류의 역사는 많이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그만한 지혜가 없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무엇을 증명하셨는가? 그것은 자기를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까지 사랑하니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에게 나오라는 하나님의 초대인 것이다. 

아직도 자존심, 체면, 혹은 이유 없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주저하는가? 예수님께서 슬퍼하신다.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남은 문제는 당신뿐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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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4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사랑할 대상은 아닙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딤전 6:10) 그럼에도 말세에는 사람들이 더욱 돈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딤후 3:2) 

돈(money) 자체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선한 일에 요긴한 도구가 되기도 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헌신의 내용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과 부요함을 무조건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올바른 기독교적 가치가 아닙니다. 

문제는 돈을 필요의 대상에서 격상시켜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미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랑의 정서는 통일성을 지향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청년이 지금까지 사귀던 이성에게 단호하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새롭게 사랑하는 대상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 청년의 이야기에 수긍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을 다 진실하게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소위 양 다리는 어떻습니까? 

분명히 이 청년도 처음에는 양편을 향한 자기의 마음을 저울질 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귀던 이성도 정들어 있고, 새롭게 나타난 이성도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편을 열렬히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반대편을 향해서는 마음이 식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결심을 세우고 한 편을 정리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섬긴다’는 말씀의 의미는 ‘사랑한다’라는 의미와 한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약해지고, 돈을 섬기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약해집니다. 

이러한 마음의 속성을 누구보다 주님께서 잘 아시기에, 우리를 향하여 돈을 사랑하는 정서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문명, 곧 맘몬(황금과 부요함의 가나안 신)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다보면 점점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에 돈을 향한 사랑이 싹트고 자라갑니다. 

그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모든 판단의 기준이 ‘돈’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가난에 대한 지나친 낙심이나, 부유함에 대한 지나친 자랑도 돈을 사랑하는 마음의 현상입니다. 심지어 우리 기도의 내용에 거룩한 본성의 변화와 은혜를 갈망함이 약해지고, 돈에 대한 소원이 강화되고 있다면, 그가 아무리 많은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내면에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성(自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기도에는 냉담하거나 시큰둥하던 마음이 돈의 문제를 두고 기도할 때에는 열렬하게 반응하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그의 내면의 질서는 위협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물론 여기에는 물질적인 것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도한 욕심을 제어하고 적당하고 아담하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삶을 망치는 돈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경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자족하기를 배우십시오.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온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샬롬~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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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7


전 세계 화합의 체전으로 불려지는 올림픽이 북경에서 치러지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았을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는 선수들을 통하여 우리들은 감동을 받고 기쁨을 얻고 있습니다.

물론 한 나라를 대표하기 위해서는, 비록 올림픽에서 꼴찌를 하는 선수라 할지라도 뛰어난 재능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만으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선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통을 감수하며 극한 훈련의 과정을 참았기에 세계인의 으뜸으로 자기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여건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의지와 결단이 없으면 신앙은 결코 건강하게 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가 자라는 것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은혜를 낭비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가 만났던 어떤 신자들은 교회와 목사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게 잘 되지 않아서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에는 교묘한 자기 포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좋은 교회를 찾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갈망하는 절실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교회 공동체가 차지하는 비중을 바르게 이해하고 목회자와 건강한 목양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2시간, 아니 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달려가서라도 ‘좋은 교회’를 찾고 거기에 몸을 담아 신앙생활 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교회는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더 이상 불평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 그 다음 심판의 대상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교회 안에서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우리 마음의 잔가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라내고 단순한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오직 우리 삶의 목적이 신앙 한 가지로 집중되도록 삶을 정비하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육신적 그리스도인은 이런 과정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세상의 즐거움에 관심이 많으며, 세상의 행복을 향한 미련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자리는 언제나 청년 유두고와 같이 예배당 창문의 문턱입니다. 한 편으로는 신앙의 위로와 격려에 귀를 기울이고, 한 편으로는 세상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가슴 부풀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사실 가장 불쌍한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자기 인생의 날들이 낭비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적당한 귀 기울임으로는 결코 우리 내면의 죄가 죽고 거룩한 성화가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신앙생활은 수십 년을 해도 제자리일 뿐입니다.

좋은 교회를 찾고 또 찾으십시오. 그리고 찾았다면, 이제는 핑계하지 말고 그 안에서 자기를 돌보십시오. 이미 완성된 자처럼 여기지 말고,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성실하게 자라가야 할 목표를 정하여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마치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처럼 자기를 여기십시오. 

영적인 성장은 옵션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그것 없이 다른 아무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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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0


마음을 기울이고 살다보면, 생활의 곳곳에서 예기치 못한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된다. 빨간 신호등 앞에 멈춰 서 있을 때, 길가에 피어난 들꽃을 볼 때, 쓰레기통을 뒤지는 까마귀를 만났을 때, 아이가 말썽을 피울 때, 키우던 화분이 죽어갈 때... 그 모든 배경의 휘장을 걷어내면 무대의 연출자처럼 그분이 계신다. 

지난봄에 어머니와 함께 히까리 공원에 갔다가 넝쿨 식물을 두 개 샀다. 처음에는 강대상 앞에 두었는데, 점점 줄기가 내려와 제법 흐드러지더니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물을 충분히 주어야 하는 넝쿨 식물의 특성상 밖에다 두고 키워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고 교회 입구에 철사를 달아 매달았다. 

처음에는 충분한 햇볕과 매일 물을 주는 정성으로 푸르러갔다. 그런데 여름이 깊어지며 한 주간 사이에 병들고 말았다. 작열하는 태양을 직접 쏘이고는 견디지 못해서 잎이 타들어간 것이다. 윗부분의 잎들이 말라갈 때에 그것을 발견했지만,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것이 번거로워서 그냥 방치했다. 길가에 자라는 식물도 많은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이놈도 적응하고 이겨낼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고작 일주일 사이에 화분 하나가 거의 죽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길가에 식물이야 그분이 키우시는 것이지만, 지금 이 화분은 내게 맡겨진 것이고, 그래서 나와 이 화분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 되었다.

어쩌면 화분의 잎사귀들을 흉측하게 타들어가게 한 것은 작열하는 태양이 아니라, 나의 안일함과 무관심일지도 모른다. 고통 받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그것을 무시했을 때, 화분은 죽기를 작정했을지도 모른다...

조용히 기도하는 동안, 주님이 내게 화분 돌보는 법을 가르치셨다. 에덴동산의 관리자로 임명되었던 아담처럼, 주님은 내게 생명을 돌보고 관리하는 것의 보람과 기쁨을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하나씩 깨달음을 따라 걷다보니, 그것이 단순히 화분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목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햇볕이라도 너무 과도하면 죽인다.” 

“튼튼할 때에는 며칠 물을 주지 않아도 괜찮지만 약해졌을 때에는 하루 사이에도 잎이 시들고 뿌리가 병들 수 있다.”

“벌레를 조심해라. 특별히 관심을 멈추지 말아라.”

“매사에 생명을 살리는 것의 바탕은 사랑이다. 자식을 키우듯이 생각해라.”

내 화분에는 그분의 소중한 나무들이 심겨져 있다. 그들에게 때를 따라 바람을 쏘이고, 물을 주고, 햇볕의 양을 조절하여 적당하게 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그래서 언젠가 그분의 정원이 풍성한 열매와 향긋한 꽃들로 충만할 수 있도록 나는 마음을 기울여 성실해야 한다.

때때로 잎이 시들거나 잘 자라지 않아 근심이 될 때도 있다. 내 마음 속에 몇몇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님은 모르는척 다시 말씀하셨다.

“간혹 기대처럼 되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생명은 강하다. 믿고 기다려 주어라. 정성과 사랑을 계속 쏟다보면 언젠가는 다시 활기 있게 될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고리처럼 내게 울려왔다. 나를 믿는다면 그들을 믿어라. 그리고 너 자신도 믿어라...

하나님의 음성이 듣고 싶다면 기도의 자리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그분은 만물에 충만하시다. 하지만 내가 들었던 그분의 음성은 항상 기도의 자리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었다. 기도 없이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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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3


이번 주에는 톨스토이의 [아무도 모르는 예수]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그의 [회고록]과 더불어 기독교 명저(名著)로 일컬어집니다. 이 책을 통해 톨스토이가 기독교 신앙에 마음을 열게 된 동기와 그가 얼마나 자기 신앙을 위해 성경에 열심을 내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중이 성경과 분리되어 있던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가질 수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시대의 대중과 엘리트들은 대부분 성경에 대하여 ‘무지’의 수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톨스토이의 열정은 특별한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대문호(大文豪)라고 불립니다. 그의 작품들은 특별히 다양한 인격의 내면적 묘사가 탁월한데, 마치 모든 사람들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그는 글을 써내려 갑니다. 항상 그의 이런 필체와 문학적 깊이가 신비롭기만 하였는데, [아무도 모르는 예수]를 읽는 동안 그 바탕을 가늠하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복음’에 목말라 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전통이나 해석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본래적 복음을 갈망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성경을 문학가의 안목과 식견으로 해독해 갔습니다.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은 그가 살았던 현실, 이를테면 그가 속했던 사회적 바탕을 이해하지 못하면 일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보입니다. 그의 판단과 이해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지적인 고뇌와 갈등, 무엇보다 참된 신앙의 목마름을 그가 절절히 가졌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복이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으로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말한다면 그가 바로 ‘톨스토이’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당신은 얼마나 예수를 알고 있습니까?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써 보셨습니까? 일상적 글이 아니라, 복음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기 위하여 전심을 기울여 본 적이 있습니까?

성경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그저 지루하고 답답한 책은 아닙니까?

톨스토이는 성경의 모든 부분이 ‘복음’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성경관은 적어도 순전히 복음주의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는 성경 속에서 복음을 가려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그는 적어도 성경 속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기대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런 진지한 태도가 성경을 성경되게 하였으며, 또한  그의 글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이 묻어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의 불행은, 그들이 어디서나 성경에 ‘대하여’ 듣지만 정작 제대로 듣지 못하고, 또한 성경 자체를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한 번도 성경에 전심을 기울여 보지 못한 신자는, 사실 신앙의 뿌리가 허술하고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곧잘 감동과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해가 지기 전에 그런 은혜의 감동을 혈기와 낙심으로 바꾸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믿으려는 방향성만 가지고 뭘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향한 당신의 태도가 당신 신앙의 바로메타입니다. 거기 열정과 노력이 담기지 않는다면, 당신이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을 펴십시오. 그 앞에서 진지하게 듣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그것만이 우리가 구원의 길을 안전하게 걷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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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6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3차 오일쇼크라고 할 만큼 국제적으로 경제의 어려움을 겪는 이때에 ‘촛불정국’은 그야말로 여러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와 정치는 되도록 거리를 두어야 하고, 목사는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정치적 논쟁으로 복음의 길을 막는 것은 우매한 행위이다. 자기 생각은 안으로 갈무리 하고, 타인을 존중하며, 서로 관용하는 것이 신앙의 미덕(美德)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오랜 만에 종교가 종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도 목도한다. 

지난 주말에는 시위의 과격화와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서울 거리 곳곳에서 유혈이 낭자했다. 무고한 시민들이 피를 흘렸고, 전투경찰이라 불리는 젊은이들이 그야말로 시민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관료들은 더욱 강경한 발언들을 쏟아냈고, 경찰총장은 국민을 협박했다. 국민의 이성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두려움을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려 한 것이다. 양측은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의 교만을 꾸짖음’이라는 성명과 함께 천주교 사제단이 광장으로 나왔다. 그들의 침묵과 행진은 일시에 시민들의 불안에서 비롯된 폭력성을 잠재우고 빨강색으로 덧칠되고 방향을 잃어가던 촛불을 위기에서 살려냈다. 다음으로 기독교 목사들이 설교할 때 입는 가운을 입고 7월의 거리로 나섰고, 다시 수천의 스님들이 ‘국민이 곧 부처님이다’라고 외치며 법회를 열었다.

나는 종교간의 대화나 타협에 관심이 없다. 나는 내가 만난 복음의 진리에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천주교 신부를 조롱하거나, 불교의 스님을 비하할 생각도 없다. 다만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서로 타협하거나 일치하려는 생각 자체가 모순이요, 독선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교를 떠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 삶의 고뇌를 얘기하고, 현실에 대하여 의논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오늘 대한민국의 시청 앞 광장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믿고, 그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시대적 현실에 맞서 빛으로 일어났다. 불안한 눈빛으로 제3공화국을, 5공화국을 회상하던 시민들에게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대한민국의 사제들이, 목사들이, 스님들이 지켜준 것이다.

누가 더 교세가 크고 일반의 호응을 많이 얻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천주와 부처에 대하여 이해가 일천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예수라면, 오늘 대한민국과 같은 상황에서 결코 유리하는 백성을 외면만 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분은 소를 수입하고, 수입하지 않고와 같은 지엽적인 문제에는 초연하셨다. 하지만 한 인간의 존엄이 위기를 겪을 때, 예수님은 누구보다 용감하셨다.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분이기에,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의 존엄이 짓밟히고 조롱당하는 것을 누구보다 참지 못하셨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큰 소용돌이 안에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소용돌이가 그간에 실추되었던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교회가 부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를 조심스레 가져본다. 몇몇 어이없는 방해꾼들이 초를 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조국과 교회의 모습은 나름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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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9


나는 말을 갓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외할머니에게 기도를 배웠다. 재미있는 음조와 반복으로 이루어진 이 천상의 노래는 그 시절 어린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몸을 적당히 앞뒤로 흔들며 '아버지'를 섞어가는 노래... 그 노래를 조금씩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나의 언어가 습득되었다.

그리고 주일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성경을 읽고 외웠다. 연말마다 성경암송으로 상을 받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머리가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은혜를 받았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 시절에 외우고 익혔던 것들이 가끔은 아스라히 생각이 난다. 

아마도 그 시절의 가르침들은 내 뼈 속에, 살 속에 잘 박힌 못과 같이 스며들어 있는가 보다. 덕분에 혼란과 갈등 속에서도 나름대로 길을 찾으며 여기까지 오는 힘이 되었던 것 같다. 

기도와 말씀의 훈련은 평상시에는 그 유익을 잘 모른다. 그러나 성실하게 행하면, 결국에는 엄청난 능력으로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킨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3장15절) 


바울은 디모데가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그 신앙적 바탕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도 그렇게 자라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바리새인의 풍속을 좇아 경건의 훈련을 쌓았지만, 그가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 그것은 한낱 지식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예수를 만났을 때에, 그의 어린 시절부터 축적되어 있었던 이 모든 것들은 엄청난 자산이 되었고, 위력을 발휘했다.

이것은 비단 어린 아이의 일만이 아닐 것이다. 신앙의 승패는 습관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 그가 평소의 삶에 얼마나 기도에 전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왔는지 우리는 시련의 시기를 통하여 확인받게 된다.

다윗은 시편 56편6절에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기도했다. 그가 평소의 삶에 흘렸던 눈물과 땀은 그저 허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 앞에 모아지고, 그에게 은혜가 베풀어지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고, 승리의 삶을 살기 원한다. 그러나 정작 평소의 삶에서 자기의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으려는 노력은 소홀히 한다. 

기독교는 굿이 없다.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돌출된 행동이 아니라 본심을 살피신다. 그 본심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도, 그분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기도와 말씀으로 시작했다면 한 걸음 전진한 것이다. 비록 현실은 실패한 하루일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반드시 기도의 눈물과 땀은 영적인 유익으로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

반대로 오늘 하루에 기도와 말씀이 없다면 그는 퇴보한 것이다. 비록 현실은 당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될 것이다. 고난이 없는 인생이 없고, 인생의 날이 항상 평안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을 체질화시켜라! 뼈와 살 속에 말씀과 기도의 은혜를 담아라. 그것만이 영적인 승리를 누리는 비결이다.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행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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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5


매우 모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참 평범한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삶의 길은 단조롭다. 

엄마들은 ‘남들처럼’ 아이를 키우는데 조바심한다. 다른 아이들이 걸을 때 즈음이면 우리 아이도 걸어야 하고, 다른 아이들이 말할 때 즈음이면 우리 아이도 말을 해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디면 근심이 늘고, 조금이라도 빠르면 기뻐하고 자랑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래서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가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그 ‘평범’의 범주 안에서 별 생각 없이 달려왔던 것 같다. 하나의 깃발을 잡으면 다음 깃발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주저하거나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었다. 그저 최선을 다해 빨리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만 주력하면 되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아직도 많은 경우에는 변하지 않은 과거의 모습들이 남아 있지만, 그러나 어떤 부분들에 있어서는 놀라운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를테면, 공부가 전부는 아니니까 무엇이든 소질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과거에는 거의 이단자적 생각으로 사람들의 놀라움을 샀다.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몸소 따르지는 않더라도 동의하거나 수긍한다.

그래서 내 아이들의 인생은 보다 폭이 넓어진 것 같다. 성경에 갈릴리 뱃사람이 천대를 받았으나 오늘에는 결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내가 자라던 시절에 차별되었던 많은 직업과 분야들이 오늘에는 그 의미를 인정받고 있다.

내가 살았던 40년의 세월이 이처럼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면, 앞으로 살아갈 40년의 세월은 또 얼마나 많은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새로운 미지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년 발전하는 컴퓨터 기술과 로봇의 발달, 인터넷의 변화, 혹은 기후재앙까지 우리의 예측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삶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쉬워질 수도 있고, 또한 인간 탐욕의 결과로 참담한 재앙을 불러들여 비참해질 수도 있다.

개인적인 미래만큼이나 나는 목사로서 교회와 복음의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이미 기득권층의 대변인으로 오해받고 있는 조국의 교회는 넷심(Net心)과 젊은이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고 있다. 물론 당장이야 교회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이탈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러한 부정적 인식들이 점점 교회를 약화시키고 우리의 미래를 어렵게 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과거의 방식도 좋았다. 하지만 이제도 그러한가? 

복음과 교회에 있어 단조로운 관습의 틀을 깨고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면, 결국 교회는 세상 밖으로 밀려나 ‘그들만의 천국’이 되고 말 것이다. 훌륭한 사냥꾼은 새를 향해서가 아니라 새가 날아갈 자리를 향하여 활을 쏜다고 한다. 지금 당장에 훌륭한 교회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갈 날들을 통해 점점 견고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께서 꿈과 예언의 영이라고 말해 준다. 그분의 은혜 아래서, 우리는 정확하게 미래를 예견하고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복음의 사람들이란 미래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로마에 집중했던 것처럼, 루터와 칼빈이 새로운 개혁의 중심으로 도시상공인을 발견했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도 그런 안목을 열고 미래를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당신은 미래의 사람인가? 과거의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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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8


신앙인이 제대로 살아야 하며 좀 더 탁월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다소 무시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은 너무 피곤하고 손해를 보는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둔함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실제로 예수님의 영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들이 가진 타성의 장애가 너무 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 고의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안다’고 했을 때에 당연히 따라올 경건한 의무와 그로 말미암아 감수해야 하는 손해 등이 싫었기 때문에 알아도 모르는 척을 했던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죄라고 하더라도 조금은 이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짐짓 그것을 피해가려 할 때에 그것은 ‘고의적 범죄’ 혹은 ‘교활한 외식’이 되는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탄식 보다는 꾸지람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결국 이 말씀은 ‘무지’ 보다는 ‘외식’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보다 교회 밖에서가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은혜의 감격에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라도 정작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는 분명히 스스로 신앙을 기만하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을 강력하게 하는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오늘날 조국의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고 학대 당하는 것은 말을 못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교우들은 훈련만 받으면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하나만 아는 단순한 이해입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더라도 정작 변화를 주지 못하면 그 발걸음이 오래 갈 수 없을뿐더러, 참 신앙으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했고, 진실한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결국은 신앙적 실천의 부족이 우리가 가진 위대한 복음을 오히려 초라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절감해야 합니다.

동경드림교회는 요즘의 현실에서 드문 교회입니다. 가족과 같은 친밀한 교제, 순수한 인격적 매력, 그리고 신앙적이 되려고 노력하는 바탕이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자로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교회의 양적인 성장만을 위한 말이 아닙니다. 아직도 신앙적이기 보다는 세속적이고, 아직도 적당히 모르는 척을 하고 외면하려 하거나 혹은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내면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를 나가고 어떤 목사를 만나든지 그것은 나의 관심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은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 혹은 제대로 신앙생활 하려고 노력하며 점점 나아지는 신자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성장은 저 자신을 독려할 것이며, 제가 더욱 주님을 본받아 갈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이 되어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정말 몰라서 못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님은 본심을 보십니다. 그 앞에서 정직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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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1


믿음의 역사는 항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하는 것만 같아도 사실은 미미하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100% 역사하는 가운데 우리가 믿음의 역사를 경험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가만히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다 해주실 것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정당한 몫을 맡기시고 그것을 통해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그 우리의 몫이 바로 ‘기도’이다.

예수님께 난치의 병을 가진 환자들이 나아갔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그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주님은 몇 마디의 대화를 통하여 상대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확인하시고, 그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네 믿음대로 되라!” (마9:29)

만약 그 환자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마치 이 말씀은 내게 이렇게 들렸다. ‘이미 공은 너에게로 넘어갔다. 나는 은혜로 싸인을 했는데, 너도 거기에 믿음으로 싸인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다. 겸양의 말이 아니라 이것은 진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을 곧잘 의심하거나 제한한다. 자기의 일은 결코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채워지기 힘들다고 생각하거나 낙심하기를 잘한다.

때문에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도 우리의 믿음 없음에 막히는 것이다. 

기도는 단순한 청원이 아니다. 해 달라는 요구의 나열만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있다. 성령께서 기도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와 교제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 은혜를 통하여 믿음 없는 우리의 자아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주님께서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실 때에,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믿음의 기름을 준비해 가지고 있는 사람은 평소의 삶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기도한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무엇 하나 나의 힘과 지혜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럼에도 기도하지 않는다. 이유는 바쁘고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그러하다. 그러나 정작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나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구체적으로 기대한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기도하기를 더욱 힘쓰게 될 것이다. 핑계하지 않고 기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단순한 옵션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는 삶의 밑바닥에는 추락한 믿음이 있다. 이미 좋은 것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주님의 뜻을 믿지 못하고, 원망하거나 실망하거나 혹은 자기 뜻대로만 하려는 자아가 있다. 그것이 기도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네 믿음대로 되라!’고 선언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도전이다. 이미 나는 네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는 네가 의지와 결단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주님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자기의 방식을 고집할 것인가? 그 양편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기도’라는 방식을 통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기고 의뢰할 수 있는 것이다.

동경드림교회가 기도의 경험을 좀 더 쌓아가기를 원한다. 목회자로서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정말 느낀다.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라. 그러면 응답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을 위해 이미 주님의 싸인은 떨어져 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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