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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6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장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이 결국 귀를 막아서 들어야 할 많은 지혜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 때 내가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누구의 인생에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의 후회처럼, 때로는 듣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귀’라는 것은 무조건 잘 듣는 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의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듣는 것도 ‘듣는 귀’의 역할이지만, 또한 듣지 말아야 하는 말에 꽁꽁 귀를 닫는 것도 바로 ‘듣는 귀’의 중요한 역할이라는 말입니다.

기도는 ‘듣는 귀’를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학습법을 ‘질문법’이라고 합니다. 이는 현대의 학습체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 방법인데, 현명한 질문은 현명한 대답을 가져온다는 생각을 학습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스승은 제자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역으로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의 유도 속에서 제자는 스스로 생각하여 답을 찾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성취감을 줄뿐만 아니라, 학습자에게 생각하는 방식을 훈련하게 만들어서 다른 문제에 대하여도 스스로 탐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저 자신의 경험으로 말하겠습니다. 

어떤 결정에 대하여 기도하다보면 마음이 산만해져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기도를 혼돈에 빠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때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포기하면 내 생각과 주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때는 그 모든 생각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침묵이 찾아옵니다. 이런저런 생각도 멈추고 그저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아주 예민해져서 갑자기 툭툭 가장 그럴싸한 질문들을 하나님께 던지게 됩니다. 이 질문들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는 ‘기도의 길(prayer's way)'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가끔 질문하시거나 대답하십니다. 어쩌면 오랜 시간의 기도에 대하여 딱 한 번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생각이 우리의 기도에 들어오는 순간, 어둠은 밝아지고 모호함은 명확하게 변합니다. 그분이 대답을 하시건, 질문을 하기건... 그것과 상관없이 그 자체가 바로 지혜입니다.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나면, 현실에서도 들리지 않던 많은 내용들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많은 부분들이 보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귀를 고치는 것처럼 이상하게도 전혀 색다른 감각이 마음에 생겨나서 반응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반응이라는 것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들을 소리는 듣고, 듣지 않아야 할 말에는 귀를 닫는 것입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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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9


게으름의 본질은 무능력함이라기 보다는 무목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게으름이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맹목적인 집착에 빠져 올바른 방향을 갖지 못하는 상태가 게으름의 진짜 정체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도박에 빠져 있다고 합시다. 그는 그 일에 매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그의 부지런함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요?

네리마역 앞에 ‘오션’이라는 빠칭코 매장이 있는데, 오전 9시 정도에 문을 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전 7시 정도이면 이미 그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추운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도 그들은 건물 구석에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잡지를 보면서 2~3시간을 기다립니다.

그들이 그렇게 일찍부터 줄을 서는 이유는 당첨이 잘 되는 기계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나름대로 ‘부지런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의 있는 태도가 ‘부지런함’으로 이해되기에는 뭔가 허전한 부분이 있음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무엇입니까? 바로 목적성입니다. 달리기 선수가 역주행을 하면, 그가 아무리 열심히 달리더라도 그는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열정이란 바른 목적을 향하고 있을 때에만이 미덕(美德)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정말 부지런한 사람은 항상 자기의 목적을 살피고 조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싯구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생애는 선물이며, 기회입니다. 매 순간마다 목적을 향하여 진보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고,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들의 신앙 가운데 요구하시는 충성됨과 부지런함입니다.

요즘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과연 여러분의 인생을 투자하고 열심을 다할 만큼 가치있는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또 어떤 분이 있어 아직 그러한 목적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것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부 드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바쁘다고 하여서 덩달아 ‘바쁜 것’으로 목적을 삼는 우매함을 조심하시라는 것입니다.

바쁘게 열심히 사는 것에 우선하여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사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절대로 ‘맹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환경과 사연 뒤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에 부합하는 인생에 열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바쁘게 살면서도 정작 성경의 판단 가운데는 ‘게으르고 악한 종’으로 분류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목적 없는 삶에 인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십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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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


미국으로부터 촉발된 경제불안이 전세계를 쓰나미처럼 휩쓸고 있습니다.

한국은 원하의 하락으로 고심을 하고 있지만, 일본은 엔고 현상으로 경제에 빨간 불이 들어왔습니다.

신문기사를 참조하니 도요타 자동차의 경우 1엔이 평가절상 될 때마다 400억엔의 영업이익이 공중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유럽 시장에서 점유율을 크게 가지고 있는 소니도, 유로화에 대하여 1엔이 평가절상 될 때마다 70억엔의 영업이익이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3개월 사이에, 엔화는 30% 가량 평가절상되었습니다. 그 절대금액은 약 54엔이 평가절상된 것이라고 하니, 거시적인 일본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대하다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경제적 공황이 당분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가 이미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거나 미미하게 지나가는 나라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산업후진국의 경우에나 어차피 마찬가지일까요…

이외수의 소설, [장외인간]에 보면 철저하게 돈과 명품에 중독된 아가씨가 현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돈이 피보다 진한 세상'이라고 표현합니다. 

돈, 돈 하다가는 돌아버린다는 우스개말도 있습니다만,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그런 바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불황이 주는 두려움은 더 클 것입니다.

낮과 밤으로 직장생활 해서 1억원의 여유자금을 만든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셀러리맨으로 1억원을 만들려면 족히 10년 가까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펀드나 주식 등으로 투자되었다가 하루아침에 휴지가 된다면 정말 기가 막히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현실의 충격은 단지 나라와 나라, 기업의 문제일뿐 아니라, 많은 개인과 가정들을 절망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교회가 감당할 몫은 더욱 커졌습니다. 

우리는 검소해야 하고, 이 시대를 향하여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절망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고, 예수가 되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셨습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은 아닙니다. 돈은 허망한 세상의 약속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지 못합니다. 돈이 불행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믿고 의지하고, 절대적으로 섬기는 맘몬주의가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맘몬은 고대 가나안의 신으로 물질적 부요함을 상징하는 우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둠에서 일어나 빛을 발하여야 합니다. 돈이 없다고 죽음을 생각하는 이 시대를 향하여, 사람이 돈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나오미를 찾으십니다. 흉년의 시대에 가장 비참한 자리에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비참해지지도 않는 믿음의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구원할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할 것입니다.

동경드림교회는 바로 그 믿음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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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6


가을은 책을 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특히, 야외의 벤치나 잔디 위에 앉아서 말입니다. 볕이 따뜻해서 그 아래 앉아 책을 읽다보면 슬며시 잠이 오기도 하지만, 곧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선잠을 깨우고 다시 책읽기에 몰두하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책을 좋아합니다. 항상 곁에 두고, 보고, 또한 책의 내용을 설교에도 많이 인용하는 편입니다. 책을 통해 사색하고, 이해하며, 음미하는 것은 정말 유용한 취미가 아닌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취미를 ‘독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의 어린 시절에는 특활반에서 할 만한 자기 종목을 찾지 못한 아이들이 ‘독서반’으로 모집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독서’라는 취미는 왠지 시시한 느낌이 있습니다. 제 나이의 사람들은 취미를 독서라고 써낼 경우, 특별히 즐기는 취미생활이 없습니다, 라는 암묵적인 고백을 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독서’가 결코 시시한 취미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도 꾸준히 손에서 놓지 않고 읽는다는 것은 정말 책을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구나 어느 정도 독서의 과정을 심화하고 나면, 닥치는 대로의 독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자기의 길을 찾게 되는데, 이때에는 더욱 독서가 어렵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출판물의 홍수 속에서 책을 가려 선택해야 하고, 또한 선택한 책을 균형 있게 읽어야 하며, 그 책을 실제의 삶과 인생에 연결하여 음미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은 우리의 삶에 안정감을 주고, 모든 것을 보다 깊이 생각하고 멀리 바라보게 합니다. 때문에 서양에서는 사람이 만권의 책을 읽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책을 몇 권 권할까 합니다. 구하기 힘든 책은 말고 여러분에게 손쉽게 드릴 수 있는 책을 권해 보겠습니다. 한 번 도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1. 칼의 노래 (김훈) :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남긴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자전거여행’의 작가 김훈이 소설을 썼습니다. 처음에는 1,2권으로 나왔지만, 후에 합본도 출간되었고, 일본어로 번역되어 ‘孤將’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2. 람세스 (크리스티앙 자크) : 작가는 모세와 람세스의 시대를 하나로 묶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소수학설에 불과합니다. 고대 이집트를 치밀하게 묘사했고, 탁월한 문장과 구성력을 가진 책입니다. 성경적 배경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모두 다섯 권으로 무게감이 있지만 재미있어서 한 번 잡으면 계속 읽게 됩니다.

3. 최악(Saiaku) (奧田英朗, Okuda Hideo : 최근에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입니다. 구성력도 뛰어나고 글이 맛이 있네요. <공중그네>라는 소설도 유명하던데, 근간에 한 번 찾아서 읽을 생각입니다.

4. 십자가를 경험하라 (김남준) : 이번 여름에 아웃리치를 왔던 열린교회의 김남준 목사님 책입니다. 복음의 정수를 담았다고 할까요... 개인적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같은 내용으로 저작했던 <구속의 십자가>를 생각나게 합니다.

5. 순전한 기독교 (C.S.루이스) : 루이스가 들려주는 종파를 떠난 기독교 본질에 관한 탐구입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이 책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인 사유가 돋보이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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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9


재일 축구선수 정대세(鄭大世·가와사키 프론타레). 

아이치(愛知)현 출신의 재일동포 3세인 그는 올해에 들어 유명해졌다. 지난 2월에 있었던 동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북한대표로 출전하여 일본전과 한국전에서 연이어 꼴을 넣었기 때문이다. 

그의 플레이는 저돌적인 힘과 지능이 함께 조화를 이루었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축구 선수로서의 능력만큼이나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그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스물 네 살의 젊은이면서도 ‘조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자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현재 ‘북조선’의 국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정대세는 일본 내에서 한국국적을 가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조국을 북조선으로 선택하여 ‘북조선’ 대표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 현실이 재일한국인의 근대사를 함축하는 예가 아닐까 한다.


오히려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분단의 상황이 낯설었다. 

서울에서 자유로를 달려 2시간 안쪽이면 통일전망대에 올라 북한땅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그것은 시야일 뿐 모든 접촉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아니, 접촉뿐 아니라 북한을 생각하는 것조차 몹시 경직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 땅은 동토의 땅이요, 나와는 상관없는 피안의 저편이었다.

그러나 일본에 와서 사는 동안 그 땅이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일본에 수많은 민족학교들이 있어 아이들을 한글과 한국말로 가르쳐 키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들 중에 정대세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토록 두려웠던 ‘조총련’이라는 말이 그렇게 험한 이미지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치나 이념과 같은 것은 일본에 끌려와 정착해야 했던 민초(民草)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버거운 현대사의 현실을 넘어 지금도 낯선 이 일본 땅에서 어떻게 자기를 지키고 자식들을 키울 것인가가 중요했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경제발전의 기회를 잡기 위하여 그런 재일동포들의 고민을 외면했다. 그 무책임 속에서 차별과 학대를 참고 견디면서 민족교육을 지켜온 결과가 바로 ‘정대세’라는 젊은이로 열매 맺은 것이다.

그가 북조선을 ‘조국’이라 칭하고 대한민국을 ‘역시 조국’이라 칭하며 일본으로의 귀화를 당당하게 거부하는 것을 보면서, 애국가의 가사 한 줄이 생각났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조국의 교회는 아픔을 품고 있다. 나는 그 아픔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하신 조국교회의 가시라고 생각한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 한반도의 반쪽에는 골목마다 십자가가 세워졌지만, 그러나 나머지 반쪽에는 신앙의 씨가 마르고 성도들의 피가 골짜기마다 진달래처럼 흐드러졌다. 하나님은 그 반쪽의 가시를 통해 조국의 교회를 겸손하게 하신다. 더욱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마음으로 연단되게 하신다.

그래서 나는 이 일본에서의 선교가 21세기의 열쇠라고 생각한다. 정대세 같은 젊은이들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조국을 하나 되게 하고, 닫힌 북한의 문을 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꿈을 품었다. 이제는 길을 찾을 차례이다. 아마도 일본에서 목회하는 동안 계속해서 이것이 내 사역의 화두(話頭)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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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9


저녁식사를 하고 커피를 두 잔 탔다.

아내와 마시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두 아들이 커피 맛을 보겠다고 서로 아우성을 쳤다.

준혁이가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종종 커피 먹는 것을 허락했다. 더운 여름철 집에서 냉커피를 타 먹으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찬혁이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보류였다. 그러나 기다릴 찬혁이가 아니었다. 기회만 있으면 엄마와 형의 커피잔을 노렸고, 그 때마다 충돌이 일어났다.

역시나 이번에도 엄마의 커피잔을 잡고 홀짝거리는 찬혁이를 향하여 준혁이의 텃새가 시작됐다.

"야, 초딩... 니가 왜 커피를 마셔? 내가 니 나이에는 커피마실 생각도 못했다."

"아이고 중학생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 학생증 쪼가리 하나 있는 거 밖에는 다른 것도 없으면서..."

"야 사복! 왜 차이가 없냐? 하늘과 땅 차이지..."

"그래, 그 잘난 교복. 비싸기만 하지 품질도 별로 좋지 않은 교복 입는다고 되게 잘난 척을 하네..."

그 때 곁에 있던 내가 갑자기 아내에게 물었다.

"얘네들 12살하고 14살이지?"

아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박장대소를 했다. 몸집은 준혁이가 훨씬 크지만, 그도 계속 장담할 것은 못된다. 2년이면 남자아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이제 마흔의 고개에 들어서고 있는 아내와 나의 눈에는 12살과 14살의 초딩vs중딩 다툼이 참으로 가소로웠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생사가 그렇지 않을까? 잘난 사람은 얼마나 잘났고, 못난 사람은 얼마나 못났을까? 우리의 눈에는 그것이 한없이 커 보이기만 하더라도 정작 하나님의 눈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잘났다고 아우성치고 삿대질하는 것이 아닐까?

인생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우리의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다투고 화낼 많은 이유들을 가진다. 우리는 스스로 잘났고, 남을 무시하며, 때로는 남에 대하여 심하게 행동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관점은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관점이다. 본질과 본질이 아닌 것이 보이고, 여유로와지며, 긍휼이 생겨나고, 상대를 존중하고 포용함으로써 평강을 얻는다.

지금 어떤 관점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가소로운 우월감으로 충돌만 일이크고 있지는 않는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을 지니기를 기도하라. 그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성령충만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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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8


인생은 불투명한 창문을 가지고 있다. 얼핏 저편이 보이는 것도 같지만 결국 아무 것도 확실히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알지 못하는 저편을 향하여 창을 열고 대면하는 용기.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기로 결심하셨을 때에,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가지시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 되어 인간의 모든 약함을 친히 경험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생의 불투명한 창문 이편에 스스로 서신 것이다. 우리처럼 내일의 불안, 선택에 대한 갈등, 심리적인 고통들을 그분도 겪으셨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태복음 26:38)


예수님이 인생의 고민에 맞서 잠을 이루실 수 없었다면, 우리 중의 누구도 그것을 완전히 빗겨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처럼 인생에서 고통스러운 밤을 경험한다. 심지어 예수님처럼 누군가 함께만 있어줘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밤에 우리는 혼자 남을 때가 많다. 

고민과 고독이 그 어감도 비슷하듯이, 우리 인생에 가장 고민스러운 순간에는 언제나 고독하게 혼자 있어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십자가의 고통이 6시간이라고 생각하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 

기록으로 볼 때에,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가 비록 십자가형의 기간이지만, 실상은 예수님의 일생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 십자가의 그림자 안에 놓여 있었음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혹은 암으로, 혹은 사고에 대한 불안으로, 혹은 파산에 대한 걱정으로, 혹은 깨어진 부부관계로 자신의 인생이 파경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인생의 십자가로 상징되는 고민일 것이다.

그리고 그 끝 모를 불안은 어느 정도 우리 인생의 바탕이기고 하다. 우리가 ‘고민’으로부터 해방되어 편히 잘 수 있는 날이 일생에 며칠이나 될까? 아무리 낙천적인 사람이라도 사람은 누구나 십자가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간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의 의미는, 그런 우리 인생의 버거운 짐을 함께 감당하기로 약속하셨다는 말이다. 인생의 고독을 아시기에,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가까이 찾아와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래서 신앙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항상 제일 힘든 순간에 제일 은혜가 넘치게 된다. 이것이 곧 십자가 약속의 실현이다. 

불안한 밤에 고개를 깊이 숙이고 불투명한 창문을 기도로 열라. 내일이라는 현실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나면, 현실의 불안은 대부분 사소한 것이 되고 만다.

십자가는 약속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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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1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네번째 요소는 '자기사랑'이다. 

신학교 시절에 구원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면, 항상 도달하는 종점이 있었다. 그것은 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했느냐는 것이었다. 인간의 경외 없이도 충분히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굳이 사람을 만들어 골머리를 썩을 필요가 있었느냐? 그냥 하나님 스스로 행복하시면 그만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사람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실망과 슬픔도, 십자가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창세기 1장에서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된 바로 그 하나님의 환한 미소만이 우주에 가득하지 않았을까?...

목사가 되어 목양의 심정을 경험하고 내 자신이 아빠가 되면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 헤아리게 되었다. 진실한 사랑은 자기사랑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사랑의 방향은 자기 안으로부터 흘러나와 밖으로 향한다. 진실한 사랑은 그렇게 자기 이외의 존재에 부어질 때까지 만족되지 않는다.

사람이 창조된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바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내 백성, 내 자녀라고 부르시는 이유이다.

적당한 범주의 자기 사랑은 그릇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통하여 타인의 소중함을 배우고, 사랑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시는 까닭은 하나님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자기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부어 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근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 사랑은 사랑의 가치를 타락하게 한다. 마치 끝없이 받아들이고 내보내지 못하는 사해가 죽음의 바다를 이루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흘려보내는 역할에 부실하면, 결국에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품성 자체가 파괴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 소유, 갈취, 학대가 이루어지는가? 그러나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스스로 사랑이라고 생각해도 그것이 사랑일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생명이지 죽음이 아니요, 사랑은 빛이지 어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유한한 우리 자신 안에 담을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고 새로운 사랑을 우리 안에 담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서 사랑을 우리 밖으로 흘려보낼 때에 기뻐하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는다. 더 모으고, 더 움켜쥐고, 더 갈망한다. 채우려는 의지만 있지 받은 것을 헤아려 흘려보내려는 의지가 없다. 자기를 우선으로 사랑하다가 일생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사랑을 영원히 지속하는 비결이 여기 있다. 미숙한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라.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에는 자기를 사랑하는 지혜라는 것을 배우라.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사랑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갚으라. ‘자기’라는 틀을 깨고 하나님의 넓은 우주로 나아가라...

결국에는 자기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배우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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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4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세번째 요소는 '실망'이다. 의심이 믿음에 끼어든 불순물이라면, 실망이란 기대와 소망의 반대편에 드리우는 그늘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보상을 기대한다. 전능한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어 주시고, 그 능력으로 나를 위해 봉사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망이 찾아든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진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삶에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과 이런저런 문제들은 우리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그렇다면 이 문제들은 왜 여전히 나를 괴롭히지? 왜 하나님은 그 엄청난 능력의 조금 만이라도 나를 위해 써 주시지 않을까? 

필립 얀시의 인상적인 책이름처럼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실망(Disapointed with God)'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영적인 순례의 일부이다. 우리는 이런 실망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인지, 아니면 그분의 능력인지 구분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조차 여전히 그분을 사랑할 것인지, 아니면 그분과의 사랑을 부정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을 기다리셨다. 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보아도 이러한 하나님의 기다림은 놀랍다. 더욱이 인류의 역사를 두고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경이적인 기다림이다.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그분의 방식으로 일하시며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사랑도 이런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어떤 모습에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실망을 극복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때, 바로 그런 모습과 마음으로 사랑하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망'을 허락하시는 이유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실망'이라는 고개를 다 오르지 못한다. 그들은 중턱에서 포기한다. 그들의 가슴에는 다 이런 말이 담겨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만 이러실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이미 얼마나 많은 실망을 그분께 드렸으며, 그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살아왔는지... 그분의 실망에 대한 보상이 어쩌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실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실망을 넘어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그것은 힘든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순수한 사랑의 실체를 비로소 배우게 된다.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을 구분하고, 영광스러운 신비가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법을 새롭게 배운다. 

참 사랑은 이유가 없다. 때문에 실망도 없어야 한다!

실망했다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찬양하라. 다윗처럼 그렇게 하라. 실망의 고개만 넘어서면 찬란한 은혜가 기다린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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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7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두번째 요소는 의심이다. 

의심이란 금광석에 섞인 불순물과 같다. 의심은 전혀 믿지 않는 불신앙과는 다르다. 의심은 믿음이라는 황금을 포함하지만, 그렇다고 황금과 같은 영광은 없다. 

아무도 돌과 황금이 섞인 금광석을 그대로 이용하는 사람은 없다. 거기에서 불순물을 걸러내고 순수한 황금을 얻기까지 그것은 가치는 있지만 유용하지 못하다. 

의심은 믿음의 유용성을 방해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선한 것들을 받는 탁월한 방법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을 증진시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시고, 우리는 그 응답을 통해 하나님을 느끼며 사랑한다.

그런데 의심은 믿음의 순도를 떨어뜨려서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받지 못하게 만든다. 

더 나쁜 것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며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이다. 결국 의심은 원망하는 마음의 원인이 되곤 한다.

맞다. 의심한다는 자체가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사믿음일 뿐이지 참 믿음은 아니다. 참 믿음은 의심을 극복하고 전적인 순종과 신뢰를 드릴 때에만 완성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 마음의 의심에 대하여도 해답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지 못하면서도 믿는 척을 하는 것에 분노하신다. 그것은 영적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 마음의 의심을 거짓 없이 드러낼 때에 그러한 우리의 약함을 치유하시고 믿음의 선물을 주시기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의심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정직이다. 의심한다고 하여서 그 사실을 감추거나, 그것을 이유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손에 흙이 묻은 아이가 아빠를 향해 걸어가듯 담담히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나아가면 된다. 그리고 두 손을 아빠에게 내밀면 다음은 선하고 사랑 많으신 우리들의 아빠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닦을 것을 닦고, 멋진 솜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쥐어주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우리가 손을 뒤로 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빠에게 간다. 그리고 손을 내밀라는 아빠의 요구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등 뒤로 감춘 손을 내놓지 않는다. 그렇다고 과연 아빠가 모르실까? 하나님이 우리의 의심하는 마음을 모르실까?

의심한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죄송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의심 받는 것에 익숙하시다. 그분은 우리의 의심을 언제나 극복해 오셨다. 마치 아이의 손을 잡고 산에 오르는 아빠처럼 그분은 우리와 함께 '의심'이라는 장벽을 넘어 참 믿음에 이르는 여행을 수없이 반복해 오셨다. 그래서 우리가 도움을 청하기만 한다면 이러한 은혜는 언제나 가능하다.

정직함을 통해 의심을 털어내라. 그래야 응답받는다. 

믿음의 응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이 비로소 느껴진다. 그분의 음성에 우리의 영혼이 집중하게 된다. 포기와 헌신에 대한 말씀조차 순종할 수 있는 용기가 자라나는 과정은 믿음의 응답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의심 없는 믿음이 정말 중요하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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